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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웅 Jan 07. 2024

'삶'이 지나가고..

영화 <치히로 상>을 보고 나서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삶'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치히로상' 그 자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던져졌고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의 삶을 살아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몫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은 누군가와 계속해서 관계를 맺기에 '공동'의 몫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에서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며 깊이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든 간에 우리는 한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성장을 통해 어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또 그 때는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학창시절의 친구들과도 어른이 되어갈 수록 멀어집니다. 언젠가 한 평생을 함께 할 연인을 만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삶의 끝에 존재하는 '죽음'은 결국 누군가와 평생 함께 하는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죽음'이 우리 삶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인지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치히로상'의 그 모습 자체 그대로처럼 '공허'하고 '고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지만 절대로 그 관계는 영원할 순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세계에 남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동안 생기는 '즐거운 시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그 '즐거운 시간'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우리는 결코 붙잡아둘 순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러한 '시간의 선' 위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 또한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그 선 위에 존재하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지만

우리는 살아가다가 때론 멈춰서서 쉬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각자 '인생걸음'의 속도를 '조절', 혹은 '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특히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큰 상처를 입을 수록 인생걸음의 속도를 조정하는데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죽었든 살아 있든 다 물 위에 떠... 몸부림치지 않으면 물에 뜨지만 버둥대면 가라앉고 말지"  - 우츠미 점장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극 중 '우츠미' 점장의 말처럼 우리는 삶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수록 그 고통 속에 더 잠식되곤 합니다. 이 작품에서 '치히로상'도 사실은 겉으론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상냥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치히로상>의 주인공은 <더 웨일>의 주인공인 '찰리'와도 닯았습니다.

두 사람의 '겉모습'은 성별도, 생김새도, 나이도, 인종도,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 찔린 상처로 '고독'과 '공허'로 가득차 있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원'을 찾는 인물이라는 점에서요.

<치히로 상>의 '치히로'(왼쪽) 와 <더 웨일>의 '찰리'(오른쪽):  두 인물 모두 공허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 아이러니 한 점은 '고통'의 삶을 겪은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줄 수 있고 그것을 안아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히로상이 이처럼 '고통'을 겪은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안아줄 수 있었던 것처럼요.


"속 편해서 좋겠다. 남의 기분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오카지'의 어머니처럼 고통 속에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앞에서 '시간'과 '인생'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가다 때로 멈추어서서 스스로 각자 '인생걸음'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즉, 이 의미는 우리 각자의 삶은 비슷해보여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오카지'의 부모처럼 우리 삶은 마치 정해져있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여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타인이 겪는 다양한 고통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알더라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패배자'로 치부해버리겠죠)


어떻게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보여지는 삶을 살아가지 않기에, 또 각자의 사정으로,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외면받는 인물들입니다.

주인공인 '치히로상'부터 주인공이 어렸을 때 만난 '치히로', 치히로의 동료언니인 '바질', 홀로 마코토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 '히토미', '우츠미' 점장도 그렇구요. 어쩌면 그렇기에 그들은 고독한 삶에 잠식된 '치히로상'에 더욱 끌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인생의 공허함을 한번쯤 느껴본 관객 또한, '치히로상'의 모습에 끌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그리고 이 작품에 빠져든 관객들은 그러한 '치히로상'이 찾은, 같은 별에서 온 '타에' 부부가 운영하는 도시락 가게의 '따뜻함' 위에서 서로 연대하고 이 '함께하는 시간'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이거 좋다' 하면 '그거 좋네' 하고 공감해주면 좋겠어요. 제가 '그렇지?' 라고 말하면 '그렇다'고 말해주고요. 뭐랄까.. 제가 원한 건 그것 뿐이었거든요." - 치히로 상

이처럼 사실 치히로가 바랐던 것은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도 이와 같이 소박한 것입니다.

이처럼 쉬운 일인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할까요?


 "지금 그대로의 네가 좋아" 

'타에'가 '치히로상'에게 건넨 이 말처럼

우리가 지금 타인을 바라볼 때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어떤 별에서 왔든,

지금 어디에 있든,

앞으로 어디를 가게 되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생은, 

나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나와 같은 별에서 온 사람을 찾는 동안에,

그렇게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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