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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한줄 Feb 10. 2022

공동저자, 당신께

대학일반부 장려상 - 이경화

공동저자, 당신께


논가의 개구리울음소리가 듣기 좋은 5월의 밤이에요. 모두가 곤히 잠든 밤.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침실에 들어가 누우면 세 개의 숨소리가 들리죠. 하나는 당신 숨소리, 그리고 나머지는 두 아이들의 숨소리. 나는 눈을 감고 있어도 누구의 숨소리인지 구분할 수 있어요. 드르렁~ 코 고는 소리로 바뀔 당신의 숨소리, 푸쉬푸쉬 하루 종일 뛰노느라 바빴던 첫째 숨소리, 쌔근쌔근 천사같이 곤히 잠든 막내의 숨소리. 들이쉬고 내쉬는 그 숨소리들의 연주를 들으면 어찌나 행복해지는지요. 무탈하게 보낸 하루가 또 어찌나 감사한지요.


당신과 함께 가정을 꾸린 지 햇수로 6년 차. 우린 어느덧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있네요.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요. 선배의 소개로 약속된 장소로 향하던 그날.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던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앗,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느낌. 어색해하며 들어간 샤브샤브 집. 당신이 먼저 문을 열어 주는데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아,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되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왜 그랬냐구요? 당신의 바지 뒷 단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조금 황당하시겠죠? 하하하. 깨끗하게 다려진 바지 뒷 단. 길지도 짧지도 않게 툭 떨어진 남색 정장 바짓단을 보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어요. 제 직감대로 우린 만난 첫날부터 사랑에 빠졌고 1년 반이란 연애시절을 보낸 뒤 결혼을 했지요. 저도 여자인지라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었나 봐요. 동화나, 드라마처럼 공주 같은 웨딩드레스를 입고서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무조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마무리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매일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아침 밥상을 차려주고, 남편은 늘 사랑을 속삭이고, 아기는 천사처럼 태어나, 엄마의 사랑만으로 자연스럽게 커가는 건 줄 알았나 봐요. 하하.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죠. 결혼을 하고 나니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부분은 10배 20배로 많아졌어요. 생활 패턴이 다른 한 남자와 삶을 맞춰가는 부분도 쉽지 않았죠.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는 드라마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답니다. 첫째를 낳고 기르며 흘렸던 눈물이 어마어마했었죠. 애둘을 낳고 기르며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볼 때마다 우울한 마음이 커졌어요. 머리칼은 푸석해지고 눈 밑의 주름은 늘어만 가고, 생글생글 웃던 얼굴은 사라지고 퇴근해 돌아온 당신에게 짜증만 내는 제 자신이 싫어졌지요. 외식 한 번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고,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죠. 그런 일상들이 반복되고, 육아에 지친 서로의 모습들을 보며, 우리의 젊음이 이렇게 지나가 버리는구나.... 하며.. 한없이 서글퍼졌어요.


그런데 여보. 오늘 첫째와 동화책을 읽는데 사막에 사는 한 마리의 낙타가 저에게 알려주더라구요. 이 낙타는 나이가 많이 든 낙타인데요. 사막에 사는 도마뱀, 선인장, 별, 모래들이 가진 불만을 들어주고 그들이 가진 장점들을 알려주는 아주 지혜로운 낙타였어요. 그런데 정작 자신의 고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 오아시스에 비친 주름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우울해졌어요. 늘 힘이 넘치고 아름답던 젊은 시절이 그리워졌죠. 하지만 많은 생명들을 위로해주고, 토닥여주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냥 늙은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고 지혜로워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이를 먹어가며 다양한 경험과 좋은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고, 비록 얼굴은 못나졌지만 마음은 더 아름다워졌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 낙타를 보며 느꼈어요. 아~ 내가 그저 찌들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겠구나. 한 남자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혼자였을 때의 삶보다 힘들고 지치지만 하루하루 행복한 이야기들을 쌓으며 마음이 깊어지고 있겠구나 느꼈어요. 맞아요. 만약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들을 낳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행복들을 느껴보지 못했을 거예요.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일, 아이의 등원 가방을 챙기는 일, 당신의 간식과 물을 챙기는 일, 열이 오른 아이를 밤새 간호하는 일, 엄마가 되고서야 이해되던 친정엄마의 마음들, 무엇보다 아이와 당신이 속삭여주는 "사랑해"라는 말, "엄마가 최고야", "당신이 최고야"라는 말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 되죠. 6년 동안 변함없는 당신의 모습은 얼마나 감사한지요. 매일 아침 출근해 보내주는 사랑한다는 메시지,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산더미 집안일을 척척 대신해주고, 아이들과 최선을 다해 놀아주려는 당신의 마음까지. 


어른이 된다는 것, 늙어 간다는 것은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는 걸 낙타에게서 배웠어요. 그리고 느꼈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이야기를 쌓아가는 일이구나. 당신과 내가 그리고 아이들이 공동저자가 되어 재미있거나 슬프거나, 유쾌하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 되겠지요. 시간이 흐르고 나면 깊게 패인 주름이 보이겠지만, 그 주름 속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들어가 있을 것 같아 두렵지 않아요. 당신과 함께 고운 주름들을 만들어가며 나이 들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네요. 우리가 엮어가는 책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해요. 공동저자님! 내일의 이야기를 기대하며, 잘 자요♡


- 오랜만의 러브레터, 아내 올림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대학일반부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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