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지한줄 Feb 10. 2022

너무 늦은 편지

대학일반부 장려상 - 박지영

너무 늦은 편지


오빠, 잘 지내시죠? 마지막 본 게 설이었으니 못 뵌 지도 석 달이 지났네요. 부모님께는 가까이 사는 저희들이 자주 찾아뵙고 농사일도 거들고 하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난생처음 여동생의 편지를 받아 든 오빠의 놀란 모습이 상상이 되네요. 저 역시 많이 망설이다 펜을 들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게 잘한 일일까라는 고민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삼십여 년 넘게 우리 가족 누구도 꺼내지 않은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한 번은 하겠노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 가슴속에 묻어둔 그 얘기를 더 늦게 전에 말이에요.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요. 고3 졸업반을 앞두고 작은 공장에 취직이 되어 돈 벌러 대구로 떠난 오빠가, 갈 때 보다 더 시커메진 가방을 메고 서너 달 만에 불쑥 집에 들어왔을 때를요. 그리고 가족 그 누구와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곧장 작은 방에 들어가 꺼이꺼이 울던 그 울음을요. 엄마는 울고 아버지는 작은 방 앞에서 서성대기만 했죠. 저도 눈치는 있었던지라 뭔가 안 좋은 일이라는 짐작만 했을 뿐 부모님께 여쭤볼 엄두를 못 냈지요. 곧이어 달려온 약방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목소리 낮춘 대화를 듣고 알게 됐죠. 오빠의 사고 소식을요. 금형공장 낡은 프레스 기계에 엄지손가락 한마디 내주고 말았다는······.


그날 밤 옆방에서 나와 엄마는 오빠의 울음과 신음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어떤 위로의 말도요. 그 고통을 덜 수도, 나눌 수도 없기에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답니다. 숙소도 변변찮아 공장 창고 구석에 놓인 나무 침대에서 생활했다는 얘기를 하며 엄마는, 회사 상황이나 근무환경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못한 당신을 참 많이도 나무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땐 밥벌이만 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라 그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기반찬은 못 먹어도 연탄불은 꺼지지 않던 따뜻한 집을 떠나 등짝으로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 냉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는 몇 번이나 되뇌었습니다. 스무 살 정월, 시리도록 긴 밤. 엄지 한 마디와 함께 사라진 청운의 꿈을 다시는 품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 앞에 큰아버지가 처방해준 진통제 몇 알은 아무 소용없었는지 오빠도 긴 울음을 그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오빠의 사고에 어린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오빠는 학창 시절 마지막 겨울방학도 즐기지 않고 왜 그리 서둘러 돈을 벌러 떠났는지 말입니다. 게다가 야근까지 자처하며 왜 그렇게 힘든 생활을 했을까 하구요. 혹시 아무도 선언하지 않은 가난한 집 장남의 무게 때문이었나요? 장남의 무게보다 무거웠던 눈꺼풀에 손마디 하나 잃은 오빠. 그것도 하필 제일 힘 좋은 엄지손가락이라니······· 이 의문과 안타까움을 삼십 년이 넘게 품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도 나이가 들고 보니 맏이인 오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더군요. 제과회사에 운전기사로 취직한 오빠가 첫 월급으로 들여온 파란 전자동 세탁기가 아직도 기억나요. 시골집 물때 낀 깨진 시멘트 마당에서 홀로 빛났었지요. 


오빠 혼자 맏이 노릇하느라 동동거릴 때 저는 그저 철없는 여동생 노릇만 충실히 했었지요. 취직을 하여 대구로 간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고도 오빠가 취직한 회사에 대한 관심도, 오빠가 집을 떠나는 데 대한 아쉬움도 없었답니다. 공부 못하는 오빠의 진로는 상아탑 대신 산업전선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못된 동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웬일인지 그렇게 무심했던 오빠의 첫 직장 'ㅅ실업'이란 이름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네요. 


오빠, 언니와 조카들도 잘 있지요? 새언니에게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저도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남들보다 짧은 손가락 때문인지 경제적으로 늘 부족한 오빠에게 불평 한번 한 적 없는 언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집안 형편을 알아 주독야경畫讀夜耕으로 부모의 짐을 덜어주려 애쓰는 조카들도 기특하고요. 오빠, 한 번도 양지에 꺼내고 싶지 않았던 아픈 기억을 제가 괜히 들춘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저의 사죄와 위로도, 오빠보다 저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닌지 저는 영원히 오빠에겐 철없는 여동생이 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래도 늦기 전에 꼭 한번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평생 맏이 노릇하느라 애쓰셨다는 말과, 그날 밤 하지 못한 늦은 위로를요.


이젠 편지를 맺어야겠네요. 오빠, 그날 차가운 공장 바닥에 나뒹굴었을 손가락을 누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라도 했을까요? 아직도 어두운 공단 구석에서 장남의 의미를 오독한 채 쓸쓸히 헤매고 있다면 맏이 노릇과 맞바꾼 오빠의 엄지 한 마디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봉분 예쁜 손가락 무덤 하나 만들어주고 싶네요. 그때의 철없음을 이렇게라도 속죄하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오빠, 이제 부모님 걱정은 혼자 하지 마시고 저희들과 함께 하기로 해요. 8월 아버지 생신 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 갖기 고대하며 늘 건강하시고 다복한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2016. 5. 16

철없는 동생 지영 드림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대학일반부 장려상

작가의 이전글 공동저자, 당신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