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일반부 장려상 - 박지영
오빠, 잘 지내시죠? 마지막 본 게 설이었으니 못 뵌 지도 석 달이 지났네요. 부모님께는 가까이 사는 저희들이 자주 찾아뵙고 농사일도 거들고 하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난생처음 여동생의 편지를 받아 든 오빠의 놀란 모습이 상상이 되네요. 저 역시 많이 망설이다 펜을 들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게 잘한 일일까라는 고민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삼십여 년 넘게 우리 가족 누구도 꺼내지 않은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한 번은 하겠노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 가슴속에 묻어둔 그 얘기를 더 늦게 전에 말이에요.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요. 고3 졸업반을 앞두고 작은 공장에 취직이 되어 돈 벌러 대구로 떠난 오빠가, 갈 때 보다 더 시커메진 가방을 메고 서너 달 만에 불쑥 집에 들어왔을 때를요. 그리고 가족 그 누구와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곧장 작은 방에 들어가 꺼이꺼이 울던 그 울음을요. 엄마는 울고 아버지는 작은 방 앞에서 서성대기만 했죠. 저도 눈치는 있었던지라 뭔가 안 좋은 일이라는 짐작만 했을 뿐 부모님께 여쭤볼 엄두를 못 냈지요. 곧이어 달려온 약방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목소리 낮춘 대화를 듣고 알게 됐죠. 오빠의 사고 소식을요. 금형공장 낡은 프레스 기계에 엄지손가락 한마디 내주고 말았다는······.
그날 밤 옆방에서 나와 엄마는 오빠의 울음과 신음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어떤 위로의 말도요. 그 고통을 덜 수도, 나눌 수도 없기에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답니다. 숙소도 변변찮아 공장 창고 구석에 놓인 나무 침대에서 생활했다는 얘기를 하며 엄마는, 회사 상황이나 근무환경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못한 당신을 참 많이도 나무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땐 밥벌이만 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라 그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기반찬은 못 먹어도 연탄불은 꺼지지 않던 따뜻한 집을 떠나 등짝으로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 냉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는 몇 번이나 되뇌었습니다. 스무 살 정월, 시리도록 긴 밤. 엄지 한 마디와 함께 사라진 청운의 꿈을 다시는 품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 앞에 큰아버지가 처방해준 진통제 몇 알은 아무 소용없었는지 오빠도 긴 울음을 그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오빠의 사고에 어린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오빠는 학창 시절 마지막 겨울방학도 즐기지 않고 왜 그리 서둘러 돈을 벌러 떠났는지 말입니다. 게다가 야근까지 자처하며 왜 그렇게 힘든 생활을 했을까 하구요. 혹시 아무도 선언하지 않은 가난한 집 장남의 무게 때문이었나요? 장남의 무게보다 무거웠던 눈꺼풀에 손마디 하나 잃은 오빠. 그것도 하필 제일 힘 좋은 엄지손가락이라니······· 이 의문과 안타까움을 삼십 년이 넘게 품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도 나이가 들고 보니 맏이인 오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더군요. 제과회사에 운전기사로 취직한 오빠가 첫 월급으로 들여온 파란 전자동 세탁기가 아직도 기억나요. 시골집 물때 낀 깨진 시멘트 마당에서 홀로 빛났었지요.
오빠 혼자 맏이 노릇하느라 동동거릴 때 저는 그저 철없는 여동생 노릇만 충실히 했었지요. 취직을 하여 대구로 간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고도 오빠가 취직한 회사에 대한 관심도, 오빠가 집을 떠나는 데 대한 아쉬움도 없었답니다. 공부 못하는 오빠의 진로는 상아탑 대신 산업전선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못된 동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웬일인지 그렇게 무심했던 오빠의 첫 직장 'ㅅ실업'이란 이름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네요.
오빠, 언니와 조카들도 잘 있지요? 새언니에게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저도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남들보다 짧은 손가락 때문인지 경제적으로 늘 부족한 오빠에게 불평 한번 한 적 없는 언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집안 형편을 알아 주독야경畫讀夜耕으로 부모의 짐을 덜어주려 애쓰는 조카들도 기특하고요. 오빠, 한 번도 양지에 꺼내고 싶지 않았던 아픈 기억을 제가 괜히 들춘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저의 사죄와 위로도, 오빠보다 저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닌지 저는 영원히 오빠에겐 철없는 여동생이 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래도 늦기 전에 꼭 한번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평생 맏이 노릇하느라 애쓰셨다는 말과, 그날 밤 하지 못한 늦은 위로를요.
이젠 편지를 맺어야겠네요. 오빠, 그날 차가운 공장 바닥에 나뒹굴었을 손가락을 누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라도 했을까요? 아직도 어두운 공단 구석에서 장남의 의미를 오독한 채 쓸쓸히 헤매고 있다면 맏이 노릇과 맞바꾼 오빠의 엄지 한 마디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봉분 예쁜 손가락 무덤 하나 만들어주고 싶네요. 그때의 철없음을 이렇게라도 속죄하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오빠, 이제 부모님 걱정은 혼자 하지 마시고 저희들과 함께 하기로 해요. 8월 아버지 생신 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 갖기 고대하며 늘 건강하시고 다복한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2016. 5. 16
철없는 동생 지영 드림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대학일반부 장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