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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한줄 Feb 10. 2022

낭만을 찾아서

대학일반부 장려상 - 김소윤

TO. 우주 최강 미남 우리 아빠


딸바보 아빠! 안녕하세요? 우리 집 첫째 공주 행복이에요. 이 편지는 아빠의 입사 20주년을 기념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랍니다:) 20주년.. 벌써 20주년이라니 시간이 창 빠르네요. 그죠? 아니지.. 아빠한테 20년은 더딘 시간이었을까요? 며칠 전, 앨범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아빠 대학 졸업 사진을 봤어요. 지금 제 나이와 비슷했을 생각을 하니 반가운 거 있죠? 사진은 바랬지만, 앳된 얼굴로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 그 미소는 싱그럽게 빛이 나고 있었어요. 아빠가 보시기에 지금 저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나요?:)


한창을 그렇게 앨범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어요. 제가 9살 때쯤인가.. 아빠가 기을 냄새를 맡게 해 주신다며 식탁 위에서 마른 나뭇잎에 불을 붙이셨다가 유리가 깨져서 엄마한테 혼났던 일, 아빠도 기억하시죠? 그때 아빠도 많이 당황하신 것 같았는데 별일 아니라며 다급히 유리를 치우시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밤새 까르륵하던 기억이 나요.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때의 낙엽 냄새가 코 끝을 간질여서 혼자 피식 웃어요. 참 행복했어요. 금전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아도 우리에겐 낭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요. 


차가 없던 시절엔 아빠는 자전거 뒤에 텐트를 싣고, 저는 간식을 바리바리 챙긴 가방을 등에 탁! 메고, 엄마는 동생을 업고 낑낑거리며 도착한 한강 야영장에서 강바람을 친구 삼아 잠들 때까지 노래를 불렀던 기억, 처음 치를 장만했을 때 온열 기능을 보고 감탄하며 박수 치던 기억, 아빠가 처음으로 회사에서 보너스 받으신 날 세상에서 제일 큰 곰인형을 고르라며 명동, 홍대, 신촌 거리를 누비며 '더 큰 건 없어요?' 하면서 곰인형을 사러 다니던 기억, 방에 가족끼리 거실에 옹기종기 누워 먹고 싶은 것 차례로 노트에 써 내려갔던 기억들... 신기하게도 앨범 사진 속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이에요. 아마 행복했던 그 순간들의 기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소중히 남기려고 더욱 활~짝! 웃고 찍었나 봐요. 


지금은 시간이 흘러 엄마 아빠가 열심히 노력하신 덕에 공기도 좋고 작은 텃밭이 있는 우리만의 보금자리가 생겼지만, 저도 동생도 제법 큰 탓에 예전처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 데다가 아빠의 잦은 야근으로 얼굴도 못 뵙고 잠드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저 그런 평범한 가족이 되어버렸네요. 아빠가 술 한 잔 얼큰~하게 하고 오신 날엔 제 방에 오셔서 '큰 딸~ 피아노 좀 쳐주라. 난 큰 딸 피아노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더라. 연주를 들을 때마다 정말 행복해!'라고 하시는데 전 그때마다 귀찮아서 이 밤에 무슨 피아노냐며 오히려 화를 내곤 했죠. 피아노 연주해드리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저 술 취한 아빠라고만 생각하면서 아빠도 늙었다고, 열심히 돈 벌어오시는 다른 아빠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생각했어요. 어렸을 땐 아빠의 낭만이 멋져서 닮고 싶었는데, 머리가 컸다고 이젠 아빠의 낭만을 귀찮고 유치하다며 우습게 여긴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아빠의 sns를 구경하다가 봄나물을 캐는 엄마의 모습, 폭설 때문에 걸어서 학교 가는 동생과 저의 뒷모습. 김치에 막걸리 한잔하시는 아빠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그 사진들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가신 글을 읽으면서 제가 부끄러워졌어요. 우리 아빠는 변함없이 멋지고 반짝반짝 빛나는 분인데, 변한 건 아빠를 바라보는 제 눈이었어요. 저는 '김흥주'라는 사람 자체로 바라보기보다는 '아빠'라는 역할로 바라보았다는 걸..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아빠도 감정이 있고, 꿈이 있고, 여행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요. 제가 그동안 아빠의 그늘 아래서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왔다면 이젠 그늘에서 벗어 나와 아빠와 함께 걸어가고 싶어요. 아빠가 바라보시는 곳을 저도 함께 바라보고,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어느 길로 갈 것인가 같이 의논도 하고, 열심히 걸어가다 쉬었다 가자 하시면 옆에 앉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도 닦아드리면서요. 예전처럼 아빠와 나 그리고 낭만이 함께하던 행복한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이번 주 주말에 같이 자전거 타러 가실래요? 제가 앞서갈 때면 아빠가 제 등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또 이빠가 앞서 가실 때면 제가 뒤에서 응원해드리고! 운동이 끝나면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잔? 캬∼∼


아빠! 입사 20주년을 핑계 삼아 죄송하고 또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개근상도 한 번 받아보지  못했으면서 아빠가 20년간 지각 한 번 없으셨던 모습은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거든요. 이젠 알아요. 그게 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아빠의 힘이라는 걸. 전 정말로 아빠 딸로 태어나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딸이에요. 다음 생에도 아빠 딸로 태어나고 싶으니 저보다 더 오래! 건강히! 함께! 저랑 지내셔야 해요! 항상 절 믿고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리고 24년간 아빠가 제게 만들어주신 큰 날개로 훨~훨 날아가는 모습, 금방 보여드릴게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2016년 5월 15일

큰 딸 소윤 올림.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대학일반부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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