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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한줄 Jan 20. 2022

원시인에게

일반부 은상 원순진

원시인에게


우리 동네 두 개의 우체국 중 한 곳이 문을 닫던 날, 바닥까지 내려진 셔터 끝에 굳게 잠긴 자물쇠를 보다가 올려다본 우체국 간판의 현수막,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잘 지냈니? 무슨 말씀을요, 제가 더 감사했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던 것 같기도 하고, 못내 아쉬워 서둘러 자리를 뜬 것 같기도 하고, 기억마저 흐릿한 날이었어. 동네에 사람들이 줄고 우체국을 들릴 때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청원경찰관과 친절한 창구 직원들에 비해 이용객이 점점 줄면서 눈치는 챘지만 설마 우체국이 문을 닫을까 싶었거든. 이제는 집에서 걸어온 만큼을 더 걸어가야 있는 우체국 한 곳만이 남은 동네에 산다는 건, 불편함보다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일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겠지. 그 얼마 전에 우체국 앞 계단 5개와 인도까지 웬일로 우체국이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날, 임시 판매소이긴 했지만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면서 이런 일로 우체국을 찾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 후로 나는 마스크 일상에 조금씩 익숙해졌잖아. 그러니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원시인이세요?”


세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출판사에 응모하려는 원고를 등기 발송하려는데 발송이란 이름을 보고 우체국 직원이 놀라 물었을 때부터였을 거야. 원순진이라는 이름 대신 시인으로 살고 싶어 적은 필명에 직원은 눈까지 비벼가며 확인했었지. 나는 그때부터 적어도 우체국에서는 원시인으로 살았던 거야. 응모는 했지만 당선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우체국 직원의 무언의 응원을-봉투 무게를 재고 주소를 입력하고 내일 오후면 도착한다는 말을 건넬 때의 애써 마음을 담은 그 정성을-나는 눈치챌 수 있었거든. 실은 참 열심히도 보내는구나 하는 짠한 마음을 내가 냉큼 응원으로 받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아 준 직원이 정말 고마웠고 그 덕에 담담히 우체국을 드나들 수 있었어. 어릴 적 한 여름, 나만 못하는 줄넘기 이단 뛰기를 빠짐없이 실패만 하는데도 그저 말없이 시원한 그늘이 돼주던 그 플라타너스 나무를 떠올렸던 거야. 문이 닫힌 우체국은 이제 입시학원이 되었지만 그 앞 빨간 우체통은 여전히 편지를 넣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 거리두기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의 거리를 그래, 바로 편지로 채우자 하고 통화나 메신저를 통해 연락하던 사람들에게 보냈더니 예상대로 반응은 좋았어. 우편함에 고지서나 광고지가 아닌 순수 편지를 받아보고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는 연락은 우울했던 내 마음마저 일으켰지.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은 얼굴을 맞대지 않고도 여전히 친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것 같아 마음이 찡하도록 기뻤어. 그런데 폭염에 마스크를 쓰고 엄청난 양의 배달 업무 중 쓰러졌다는 집배원의 기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어.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으니까. 반드시 내 편지 탓이겠냐고 누군가 말했지만 어쨌든 내 편지도 한몫했을 테고 이에 책임을 통감하여 빨간 우체통과도 결별을 해야 했지. 대신 그동안 편지 쓰듯 일기장에 내 마음을 적어 왔으니 괜찮았어. 사실, 나는 마음을 나눌 곳이 필요했거든...


남편의 체육관을 폐업할 수밖에 없었고 코로나로 가족을 잃고 세 아이들이 온종일 컴퓨터로 수업을 해야 하는 지난 시간들을 처음에는 일상의 붕괴라고 생각했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식 발표는 참담했으니까. 17년 간 운동만 가르치던 남편이 주택시공, 냉동 창고 야간 경비, 시내버스와 통근버스 운전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만 그 자리도 인원감축을 해서 결국 먼 지역으로 가게 됐고 그 일도 임시직이라 일단 남편만 갔던 거야. 그런데 주말 어느 날, 집으로 온 남편이 자다 말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갑자기 뛰쳐나가서 내가 맨발로 주차장까지 따라가 겨우 그이 옷자락을 잡았을 때 그이는 울고 있었어. 48살 남자의 얼굴이, 울음소리가 그렇게 절망적이고 슬플 수가 있었을까. 잘 견디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다른 일들을 하게 되면서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걸 우리는 서로 몰랐던 거야. 얼마나 미안하고 또 얼마나 내가 한심했는지. 특히, 되지도 않은 글들을 봉투에 담아 우체국에 드나들던 내 모습을 그 순간 날카롭게 도려내고 싶었어. 아이를 낳고 손가락 관절염 통증으로 구부리는 것조차 힘든 나를 배려한 남편에게 손가락 마디마디 파스를 붙여가며 노트북을 두들겨 성공적인 작가가 되겠다던 내 꿈이 참 순진했던 거지. 남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병원 치료를 받고 많이 호전된 후, 좀 더 안정적인 일을 하게 됐고 주말 몇 시간은 친구의 체육관에서 운동을 가르치면서 그 일이 숨통을 트이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제는 미안함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고마워할 때라는 걸 깨달았어. 집을 떠나 고생하는 남편에게 미안했던 내가 시간제라도 벌이를 하겠다고 했던 게 아예 손가락을 못 쓰게 만들어서 남편은 또 내게 미안해했고 결국 내 미안함이 오히려 남편의 숨통을 조였던 거야. 외롭게 살아온 남편에게 작년, 형마저 하늘로 떠나고 이제 정말 나밖에 마음 둘 사람이 없었잖아. 남편은 늘 내가 행복하길 바랐지만 사실, 체육관 경기가 안 좋아지고 결국 코로나로 폐업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야 했던 몇 년간 점점 힘들어하는 남편을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녹록지 않은 살림을 꾸리느라 나도 좀 지치긴 했어. 그래서 먼 곳으로 가게 된 남편의 부재가 내겐 숨통을 터줬던 거야. 묵직했던 것을 덜어낸 것처럼 처음에는 홀가분했었는데 주말마다 만나는 남편을 보면서 외면하고 싶었지만 눈치는 채고 있었어.


얼마 전, 조금 더 가야 하는 우체국에 가서 또 한 번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왔지. 반갑게도 문 닫은 예전 우체국 직원이 그곳에서도 등기업무를 맡고 있었고 생활 잡지 귀퉁이에 실린 내 글을 봤다며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라고 해주는데 내가 살짝 눈물이 고였던 걸 눈치챘을까? 부끄러움을 마스크로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우리는 이렇듯 마스크 너머로 서로를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10살 때 촛불을 끄다가 입 주변에 화상을 입었던 친구가 평생 위축되어 살더니 이제는 내 세상인 것 같다며 마스크 쓰고 커피전문점에서 일한다는 문자와 사진을 보내줘서 내 일처럼 기뻤어. 누군가에게는 마스크의 답답함이 당당함일 수 있다는 게 내게도 큰 힘이 되었으니까. 바람이 선선해지면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오랜만에 빨란 우체통에 넣으러 갈까 해. 원시인이라고 보내도 그 친구는 눈치를 챌 거야. 결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거든. 나도 잘 지낸다고 나도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는 원시인으로 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야겠어. 또 편지 쓸게. 잘 지내!




2021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일반부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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