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픽사, 지브리 작품으로 보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의 구조
로그라인
먼저 로그라인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로그라인은 한 편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문장에는 더 이상 축약될 수 없는 이야기의 에센스가 담겨 있습니다. 로그라인의 구조는 이야기의 정의에서 언급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의 정의가 곧 로그라인인 것입니다. 이야기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1) 누군가가 무언가를 무척이나 원해서 그것을 추구해나가고
(2) 그 과정에서 장애 요인을 만나지만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
(3) 처음 원하던 바를 얻거나, 혹은 얻지 못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것을 얻게 된다.
완성된 이야기에는 여러 인물이 존재하지만 주인공을 중심으로 기술하면 됩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 13살이 되어 마녀 수련을 떠난 키키가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배달부 일을 시작하고,
(2) 고양이 인형, 청어 파이 배달 등을 어렵사리 완수하지만, 친구 톰보의 초대에도 응하지 못하고, 몸도 아프게 되고, 마침내 마법 능력까지 소멸되어버린다.
(3) 하지만 위기에 빠진 톰보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키키는 마법 능력을 다시 되살려내고, 마을의 영웅이 된다.
추상화 vs 구체화
어떤가요? (2) 같은 경우는 (1), (3)보다 축약이 더 여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장애 요인들을 하나씩 돌파해나가는 것이 이야기이다 보니, 여러 개의 장애 요인들을 하나의 문장 안에 다 언급하면 약간은 번잡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가장 큰 장애 요인 하나만 찝어서 표현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1) 13살이 되어 마녀 수련을 떠난 키키가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배달부 일을 시작하고,
(2) 그 마을에서 배달부 일을 좌충우돌 이어나가다가 마법이 약해져서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슬럼프를 겪지만,
(3) 위기에 빠진 톰보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키키는 마법 능력을 다시 되살려내고, 마을의 영웅이 된다.
이렇게 세세한 내용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축약하는 것을 추상화라고 부릅니다. 내용에 담긴 본질은 놓치지 않으면서도 크기를 줄이는 방법이죠. 완성된 원고를 로그라인으로 요약할 때는 이처럼 추상화 과정을 거칩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창작하는 과정에서는 단 몇 줄의 로그라인을 바탕으로 그것을 구체화해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구체화의 도구 1 : 세분화
아직 <마녀 배달부 키키>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13살이 되어 마녀 수련을 떠난 키키가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배달 일을 시작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작은 단위로 쪼개기 시작합니다.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키키는 마녀가 될 아이는 13살이 되는 해에 마녀 수련을 떠나는 오래된 관습에 따라서 짐을 싸서 떠난다. 키키는 밤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향하던 도중 견습 마녀와 짧게 만나고 헤어진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키키는 근처를 지나는 화물 열차 화물칸으로 들어간다. 다음날 날이 밝은 뒤 눈을 떠 보니 기차는 바닷가 마을을 지나고 있다. 키키는 하늘을 날아 바닷가 마을로 향한다.
마을에 온 키키는 어리둥절하게 마을 곳곳을 구경하다가 톰보를 만난다. 하지만 키키는 톰보가 무례하다고 생각해 외면하고 가버린다. 키키는 호텔에 묵으려 하지만 보호자도 신분증도 없어서 거절당한다. 갈 곳이 없어 마을을 떠나려던 키키는 우연히 묵찌빠 빵집 아주머니를 도와주게 된 것을 시작으로 묵찌빠 빵집에서 당분간 머물 수 있게 된다. 키키는 묵찌빠 빵집 일을 도우며, 따로 배달부 일을 시하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한 문장이 두 문단으로 덩치가 커졌습니다. 이렇게 로그 라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세분화시키면 이야기는 시놉시스라는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합니다.
구체화의 방법 2 : 연상
그런데 어떤 창작자들은 로그라인에 갇혀서 작업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연상입니다. 연상을 활용하는 창작자는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와야 재미있을 것인가?" 키키가 마녀 수련을 받겠다고 집을 떠났을 때 결국 어떤 마을에 정착해야 할까요? 창작자는 바닷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럽 풍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한 마을이라는 답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키키는 어떻게 생활을 이어나가야 할까요? 우연히 묵찌빠 빵집 아줌마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배달부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는 것이 키키의 결론입니다. 키키가 이렇게 결정하기 전에 먼저 창작자가 그렇게 답을 내린 것입니다.
통합적 구체화
커다란 덩어리를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완성느냐, 아니면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연상해서 이야기를 완성하느냐 하는 것은 무엇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성향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그 틀을 벗어나지 않고 세부적인 디테일을 잡아나가는 방식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구체적이고 명확한 하나의 장면이나 상황을 기준으로 그 다음 장면을 연쇄적으로 떠올려 나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고, 후자는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창작 과정은 세분화와 연상을 둘 다 사용하기 마련입니다.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해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시길 바라겠습니다. 도구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