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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본부 Jun 23. 2021

[04] 구조의 구체화 : 도구라는 준비물

디즈니, 픽사, 지브리 작품으로 보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의 구조

목차 : https://www.notion.so/a35af4313127472fafbfde94d1fccfea


시나리오 상의 확대/축소 기능

화가가 100호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린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화가는 거대한 나무로 우거진 숲을 그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화가는 나무의 잎사귀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 캔버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본 풍경이 캔버스 위에 정확하게 옮겨졌는지, 대상과 대상 사이의 비율이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캔버스에서 저만치 멀리 물러나서 한눈에 그림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패드로 큰 사이즈의 그림을 그린다면 확대/축소 도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도 동일한 작업 도구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원하는 비율에 맞게 확대, 축소하는 도구들은 로그 라인, 시놉시스, 씬 리스트, 트리트먼트, 원고가 있습니다. 앞에서 뒤로 갈수록 사건이 구체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분량 또한 덩달아 늘어나는 동시에 형식적인 규칙 또한 엄격해집니다.


확대 축소 도구의 두 얼굴

그런데 각각의 도구들을 살펴보기 전에 이 도구들의 이중성에 관해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작품의 로그라인이 "한 소녀의 머릿속에서 소녀에게 기쁨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감정들이 제자리를 벗어나 소녀의 감정이 소거된다면,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정도로 요약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 소녀의 머릿속에서 소녀에게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감정들이 제자리를 벗어나 소녀의 감정이 소거되지만, 기쁨과 슬픔이 머릿속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감정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함께 귀환해서 소녀가 한 차원 높은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고, 소녀가 성장하게 해준다." 정도로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전자의 경우는 이야기의 일부만 요약된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이야기의 전체가 전부 축약되어 있습니다. 어떨 때는 반토막 난 로그라인을 사용하고, 또 어떨 때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담겨있는 로그라인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답은 창작자가 창작 과정 중 어느 시점에 해당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완성된 작품은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통해 특정한 주제를 전달하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글쓰기의 처음부터 작품의 주제와 구성 방향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모험을 떠나듯, 자신이 만지는 이야기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빚어보고 다양한 모험과 실험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준삼아 이야기를 처음부터 재구성하는 과정의 반복이 창작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도구가 합니다. 이 때 사용되는 로그 라인은 비록 끝은 모르더라도, 방향만은 확실하게 지시해줄 수 있으니 창작자는 그것을 기준삼아 앞으로 가보는 것이죠.


확대/축소 도구가 자가 진단에 사용되는 경우

한편으로 이제 이야기를 다 완성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구성되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수직으로 높이 쌓아 올리는 초고층 빌딩을 지어야 한다고 한다면, 아마 정말로 수식으로 구조물들이 올라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에 확인을 거듭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처음에 미세하게 발생한 오차는 공사를 거듭하고 층수가 높아질 수록 더욱 커져 마침내는 눈에 띌 정도로 건물이 비틀어질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는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창작자는 작품을 발전시키면서 끊임없이 도구들을 참조합니다. 비단 로그라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놉시스 단계일 때 플롯이 가장 잘 보인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원고를 마무리한 뒤 파트너가 시놉을 써보라고 제안한다면 그건 이야기를 다 때려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짓겠다는 위협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가 제대로 구축이 되었는지 시놉시스라는 도구로 점검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로그라인이든, 시놉시스든, 트리트먼트나 씬 리스트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잘 만들기 위해 활용되는 도구들입니다.


확대/축소 도구가 또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과정에 사용되는 경우

드디어 원고를 마무리했습니다. 창작자는 이제 누구보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창작자는 이 이야기를 현실화하기 위해 제작사 혹은 투자자를 찾아갑니다. 창작자는 그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할 기회를 어렵사리 만들었지만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이때 이야기 전체를 핵심적인 것만 추려서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구는 이럴 때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로그라인이나 시놉시스와 같은, 상황에 알맞은 도구를 통해 작품의 도상을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죠. 이럴 때 사용되는 로그라인의 경우, 첫부분 흥미로운 후킹 포인트만 기술되어 있어서는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을 포함해서 어떤 장애요인을 거쳐, 결국 어떤 변화에 도달하게 되는지까지 충분히 기술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도구는 상황에 따라서 이야기의 일부분만 담길 수도, 끝까지 다 담길 수도 있습니다.


작법이라는 또 다른 도구

창작의 암중모색 과정에서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는 또 다른 도구가 있습니다. 이 길이 안전한 길인지, 늪 같은 것이 나타나 갑자기 빨려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창작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그 기능을 하는 것이 작법입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감상자들에게 흥미를 제공하여 계속 보게 만들고, 개연성을 부여하여 이야기가 사실적이게 느껴지도록 하고, 마침내 통찰력 있는 주제를 인물의 감정과 함께 제공하여 의미 있는 간접 경험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내가 만든 이야기라는 건축물이 폭삭 무너지지는 않는지 안전 진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작법서에서는 인물의 욕망을 강조합니다. 인물의 욕망이 동력이 되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을 아는 창작자라면, 자신이 운용하는 인물의 욕망이 꾸준하게,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력한 것을 욕망하는지 점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수정을 가하겠죠.


작법의 함정

하지만 작법의 함정도 존재합니다. 작법서가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다 포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실제 비슷한 종류의 작품들을 직접 분석해가면서 작법서를 쓴 작가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혹은 너무 까다로워서 기술하기 기피했던 오묘한 것들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욕망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디즈니, 픽사, 지브리의 작품은 대부분 인물이 여러 가지 동기를 부여받아 결정적인 욕망이 형성되고, 그것을 동력삼아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분명히 동기가 부여되지만, 결정적인 욕망이 형성된다기보다는, 인물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근원적 성격이 발현되는 행동이 연속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작품은 인물이 이야기의 초반에 여러 가지 동기에 자극을 받아 결정적 욕망이 형성되고, 그걸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주어지는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양상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작법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레퍼런스가 되는 작품들을 꾸준히 참조하는 행위입니다. 작법서에서 흔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마지막에 다 잊어버려라"라는 말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정말로 다 까먹어버리면 안 됩니다. 창작 과정에는 작법이라는 틀로 설명하기 곤란한, 그 이상의 경지와 변수가 있기에 작법을 익히는 건 기초 중에 기초라는 뜻이지, 작법을 아예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면, 작법서를 쓴 많은 사람들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기술을 왜 그토록 고생하면서 남겼겠습니까? 이 또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또 다른 참조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제 다시 원래의 이슈로 되돌아와서, 먼저 확대/축소의 도구를 각각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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