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본부 Jun 22. 2021

[03] 사건의 종류

디즈니, 픽사, 지브리 작품으로 보는 애니메이션의 구조

목차 : https://www.notion.so/a35af4313127472fafbfde94d1fccfea


사건의 종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구조물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조물을 이루는 낱낱의 재료들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건입니다. 작은 사건들이 모여서 커다란 사건을 이루고, 작은 이야기가 모여 형식적 분량에 걸맞은 한 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크기야 어떻든 이야기는 곧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은 무엇일까요?

사건이란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에 없었던 일이 생기면 그것이 크든, 작든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건축물의 기둥을 세울 때도 목재로 할 것인지, 철근 콘크리트로 할 것인지, 아니면 경량 철골조 등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의 종류는 크게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황, 처지의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

인물의 내변이 변화하는 경우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는 경우

인물이 새롭게 등장하고 퇴장하는 경우


한 편의 이야기에는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사건들이 뒤섞인 채 공존하고 있습니다. 먼저 각각의 사건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사건의 종류 1 : 상황, 처지의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는 이야기 초반에 상황의 변화를 겪습니다. 평범한 소녀였던 치히로는 우연히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진입한 뒤 부모님이 돼지로 변해 혼자가 되고,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일을 하며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전의 처지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주인공의 행동은 이전과 달라지며, 감상자들은 새로운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게 됩니다.


사건의 종류 2 :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변하는 것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토피아>에서 닉은 주디의 협박에 못 이겨 억지로 주디와 동행합니다. 하지만 주디가 닉의 목숨을 구해주는 순간을 기점으로 닉은 주디에게 진심으로 협력하기 시작합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변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좋았던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토피아>의 중후반부로 가면, 주디와 닉의 관계는 도로 나빠집니다. 시장이었던 라이언하트를 잡은 뒤 주디는 기자회견장에서 맹수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발언을 합니다. 맹수들이 야성을 드러낸 건 아마도 그들의 본성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었죠. 그걸 들은 닉은 주디에게 실망해서 주디를 떠납니다. 좋았던 관계가 한 순간에 틀어지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습니다. 이처럼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는 보통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며 발전한다는 점도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건의 종류 3 : 인물의 내면이 변화하는 경우

인물의 내면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물이 무언가를 깨닫거나 결심하는 순간이 여기에 속합니다. <소울>의 조 가드너는 도로테아 윌리엄스와 만족스런 공연을 한 뒤에도 공허함을 느낀 나머지 집에 와서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22가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물건들을 꺼내어 관찰하게 되고, 그것을 소재삼아 즉흥연주를 하다가 삶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눈앞에 당장 뭔가가 드러나는 형태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것에 비할 수 없는 놀라운 충격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그 깨달음을 기점으로 인물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알았던 것을 마침내 결심하는 순간 또한 인물의 내면이 변하는 사건입니다.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 니모를 과잉 보호하는 극성스런 부모입니다. 하지만 니모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바다거북이 어떻게 새끼 거북이를 믿어주는지 목격하게 되고, 도리가 고래 뱃속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제안했을 때 눈 딱 감고 그대로 하자 정말로 탈출할 수 있게 되는 경험을 한 뒤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니모를 자신의 틀 안에서만 기르려고 하는 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교훈을 얻게 된 것이죠. 그리고 마침내 니모를 믿어줘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말린은 그렇게 합니다. 도리를 구하기 위해 그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니모의 뜻을 존중해주는 것이죠. 이 때 말린은 그저 "니가 옳아."라고 말 한 마디 하는 것 뿐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지금껏 쌓아왔던 성격을 부정하는 엄청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 또한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어엿한 사건입니다.


사건의 종류 4 :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는 경우

그동안 감추어졌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 또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감상자와, 감상자가 이입하는 인물이 동시에 새로운 사실을 접하는 경우

(2) 감상자가 알고 있는 사실을 감상자가 이입하는 인물이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

(3) 감상자가 모르는 사실을 감상자가 이입하는 인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경우

(1)의 경우는 <천공의 성 라퓨타>를 들 수 있습니다. 주인공 시타는 무스카 대령으로부터 자신의 진짜 이름이 루시타고, 라퓨타의 공주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됩니다.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 감상자들은 주인공이 느끼는 충격을 고스란히 전달받습니다.

(2)의 경우는 <볼트>의 주인공 볼트를 들 수 있습니다. 볼트는 자신이 초능력을 지닌 슈퍼독이라고 믿고 있지만, 감상자들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볼트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될 때, 감상자들은 충격을 받기보다는 볼트가 느끼는 감정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3)의 경우는 <인랑>을 들 수 있습니다. 감상자들은 주인공 후세를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과묵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후세의 진짜 정체, 즉 소문만 무성했던 인랑이라는 존재가 다름 아닌 후세였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감상자들은 어느 때보다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전까지 보아왔던 인물에 대한 시각이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종류 5 : 인물이 새롭게 등장하고 퇴장하는 경우

인물이 새롭게 등장하거나 퇴장하는 것 또한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탄생이나 죽음도 포함됩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사건은 바로 라일리의 탄생입니다. <코코>에서 코코는 끝내 죽어 저승으로 갑니다. <겨울왕국>에서는 올라프라는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월E>에서는 이브라는 로봇이 새로 등장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빙봉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했다가 기억폐기장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큰 인상을 남기며 퇴장합니다. 인물의 등장은 새로운 전개에 대한 기대감, 인물의 퇴장은 감정의 울림을 창출합니다. 이 또한 강력한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이러한 다양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건이 없으면 이야기로서 가치가 그만큼 떨어집니다.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감상자가 계속 쳐다보고 있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조직되는 두 가지 방식

이러한 개별적인 사건들이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작은 사건이 모여 큰 사건을 이루고, 큰 사건이 모여 더 큰 사건을 이루고, 더 큰 사건이 모여 아주 거대한 사건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장면 여러 개가 모여 시퀀스를 이루고, 시퀀스가 모여 장을 이루며, 장들이 모여 한 편의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도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한 편의 이야기를 4개의 장, 8개의 시퀀스로 나눈다고 가정했을 때, 하나의 장에 시퀀스 2개가 들어갈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작품에 따라서 하나의 장에 세 개의 시퀀스가 들어가기도 하고, 두 개의 시퀀스 하고도 나머지 다른 시퀀스의 일부만 포함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면, 시퀀스, 장, 이야기는 하위 항목이 상위 항목에 종속되는 카테고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다만 한 편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의 밀도로 요약할지를 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개별적인 도구들일 뿐입니다.

개별적인 사건들이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두 번째 방식은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특정한 사건들을 묶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묶인 사건들을 "플롯 라인"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예로 든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가 슬픔이의 가치를 깨닫는 플롯 라인만 뽑아서 요약하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1) 기쁨이는 슬픔이를 천덕꾸러기로 여긴다.

(2) 슬픔이가 핵심 기억구슬을 슬픔으로 물들이는 걸 막으려다가 기쁨이는 슬픔이와 함께 본부 바깥으로 빨려나간다.

(3) 빙봉을 만나 본부로 돌아가려 하지만, 빙봉은 로켓이 기억폐기장으로 떨어져서 슬픈 나머지 주저앉는다. 기쁨이는 빙봉이를 기쁘게 해주는 방법으로 다시 일으켜세우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이가 빙봉을 위로해주자 빙봉은 한바탕 눈물을 흘린 뒤 다시 기운을 차리고 기쁨이와 슬픔이의 길잡이 역할을 계속한다. 기쁨이는 슬픔이가 어떻게 빙봉을 다시 움직이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4) 생각기차 안에서 슬픔이에게 악몽을 통해 라일리를 깨우는 건 매우 좋은 방법이었다면서 슬픔이의 가치를 조금은 인정해준다.

(5) 기쁨이는 혼자서라도 귀환하기 위해서 슬픔이를 버려두고, 회상튜브를 통해 귀환하려다가 기억 폐기장에 떨어진다.

(6) 기쁨이는 기억 폐기장에서 라일리가 미네소타 하키 경기했던 날의 기억을 발견한다. 그 구슬을 통해 슬픔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7) 슬픔이와 함께 귀환한 기쁨이는 슬픔이에게 핵심 기억구슬들과 패널으 통제권을 넘겨준다. 라일리가 슬픔에 잠기고, 슬픔이는 기쁨이를 패널로 이끈다.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처음으로 복합 핵심 기억 구슬이 만들어진다.

(8) 라일리의 본부 컨트럴 패널이 사춘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이 플롯 라인은 이야기의 주제를 운반하는 메인 플롯 라인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이야기에는 메인 플롯 라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플롯 라인이 존재합니다. 라일리와 부모님의 관계를 표현한 플롯 라인, 기쁨이와 빙봉의 관계를 다루는 플롯 라인 등입니다. 플롯 라인은 각각 그 길이가 다릅니다. 이야기의 일정 구간에만 나타났다 매듭지어지는 플롯 라인도 있지만, 메인 플롯 라인처럼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걸쳐 있는 플롯 라인도 있습니다. 또 어떤 플롯 라인들은 일정한 구간을 서로 같은 노선을 공유하기도 하며, 지하철의 환승역처럼 서로 다른 플롯 라인들이 교차되는 사건들 또한 존재합니다. 흡사 지하철 노선도와 그 모양이 비슷하다고 할까요?이제부터는 구조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2] 구조와 구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