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픽사, 지브리 작품으로 보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의 구조
씬 리스트와 트리트먼트의 선후관계
창작자에 따라 씬 리스트를 먼저 만들고 트리트먼트 단계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창작자는 트리트먼트를 먼저 만든 뒤 씬 리스트를 정리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전체 틀을 다 갖추어놓고 세밀하게 세공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선호하는 작업방식이고, 이야기를 자유롭게 구상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주로 완성하는 창작자들은 후자의 방식을 선호합니다. 어느 쪽을 선호하든 상관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씬 리스트의 특징과 트리트먼트의 특징이 합쳐진 결과물을 얻게 됩니다. 자세하게 기술된 트리트먼트에 장면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시나리오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 단계의 내용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트리트먼트의 특징
트리트먼트는 통상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 분량으로 만들어집니다. 아직 대사와 지문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않고, 줄글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글입니다. 씬 리스트가 장면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목적으로 했다면, 트리트먼트는 그와 반대로 장면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술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장면 2를 보겠습니다.
#2. 키키의 집 바깥 + 1층 : 실내+외/낮
키키는 엄마에게 오늘 밤에 출발할 거라고 말한다. 키키는 한 달 미룬다고 했었지만 마음을 바꾼 거다. 키키는 마녀 수련을 떠나려는 거다. 13살이 되면 마녀가 될 아이는 집을 떠나는 거다.
씬 리스트에서는 위와 같이 요약되었던 장면이 트리트먼트 단계에서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2. 키키의 집 바깥 + 1층 : 실내+외/낮
꽃밭이 잘 가꾸어진 키키네 집. 키키가 집으로 달려온다. 키키는 대문 옆 나무 판자 위에 있던 고양이 지지에게 오늘 밤 출발하기로 정했다고 하면서 황급히 달려간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지지 뒤로, 마녀에게 용무가 있으면 벨을 눌러달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키키가 창문 안으로 얼굴을 쑥 집어넣으면, 식탁에 앉아 있는 토라 할머니가 보인다. 엄마는 할머니의 류마티즘을 위한 약을 만드는 중이다. 키키는 오늘 밤에는 하늘이 맑을 것이라고 말하고, 엄마는 또 말도 없이 아빠 라디오를 들고 나갔느냐며 나무란다. 키키는 집으로 들어와 토라 할머니에게 인사한 뒤, 엄마에게 오늘 밤에 마녀 수련을 떠날 거라고 이야기한다. 엄마는 어젯밤 했던 말과는 달라 놀라고, 뭐라 말릴 틈도 없이 키키는 2층으로 올라가버린다. 그때 키키 엄마가 손에 들고 있던 약제가 이상 반응을 일으켜,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토라 할머니는 키키가 했던 말이 어떤 뜻인지 묻는다. 키키 엄마는 마녀가 될 아이는 13살이 되면 혼자 집을 떠나야 하는 관습이 있다고 설명해준다. 키키 엄마는 걱정이 크다. 토라 할머니는 키키 엄마가 13살이었을 때를 회상한다. 키키 엄마는 약제를 새롭게 완성하고, 토라 할머니에게 건네준다. 토라 할머니는 고마움을 표한다.
행동과 반응
어떤가요? 분량이 확 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0개에서 40개에 달하는 장면을 이와 같이 기술한다고 생각해보면, 20페이지, 30페이지를 채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관건은 얼마나 자세하게 기술하느냐입니다. 자세하게 기술하려면 인물의 행동, 그리고 그에 따라 돌아오는 반응을 기술해야 합니다. 모든 장면들은 인물의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과 반응을 기준으로, #2의 트리트먼트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
그런데 이야기의 재미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뜻밖이라는 데서 옵니다. 만약 키키가 엄마한테 오늘 밤 하늘이 맑을 거라는 예보를 들었다고 말했을 때, 엄마가 "어쩜. 너무 잘 됐구나. 당장 출발하도록 엄마가 도울게."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마치 키키의 속마음을 꿰뚤어본 듯한 대답이니 엄마와 키키는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야기적 재미는 한참 떨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리 친한 사이일지라도, 아니, 친하면 친할 수록 오히려 주고받는 말들은 그만큼 더 편한 것이 더 리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키키 엄마는 "너 또 라디오를 허락도 없이 들고 나갔던 것이냐"라고 되물었던 것입니다. #2를 처음 봤을 때 엄마의 반응이 그렇게까지 재미있다고 느끼지는 못했던 분들이라도, 앞서 가정한 뻔하고 재미없는 반응과 나란히 비교해보시면 엄마의 반응이 얼마나 적절하고 재미있는 반응이었는지 느껴지실 겁니다. 이처럼 모든 장면에서 인물의 행동에 따라 돌아오는 반응은 행동한 인물, 그리고 그에 이입한 감상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이 예상치 못했던 반응의 강도는 더욱 커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감상자들은 이야기의 세계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며, 그만큼 지루해질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장면의 안전 진단, 또 다시, 이야기의 정의
트리트먼트 정도의 분량을 갖춘 장면이라면 이제 이 장면이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문제는 없는지 안전 진단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 사용되는 도구 또한 이야기의 정의입니다. 장면의 주인공, 장애 요인과의 갈등, 변화가 그것입니다.
(1) 장면의 주인공
이야기 전체의 주인공이 있는 것처럼 각 장면마다 해당 장면을 주도하는 장면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 #1처럼 이야기의 주인공이 곧 장면의 주인공을 맡게 되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꼭 이야기의 주인공이 장면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붉은 돼지>의 경우를 보면, 비행기를 고친 포르코와 피오가 아지트 섬으로 돌아온 장면은 장면의 주인공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포르코가 아닙니다. 섬에 착륙한 포르코와 피오는 곧 숨어 있던 맘마유토단에 의해 둘러 싸이는데, 맘마유토단장은 포르코를 혼쭐내주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이때 나서는 것은 포르코가 아니라 피오입니다. 공적의 명예를 들먹여가며 공적들을 설득하는 것이죠. 이때 맘마유토단의 단장은 포르코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대신 비행기를 때려부숴 포르코가 빚더미에 앉게 해주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때도 피오는 새치 혀로 맘마유토단장과 휘하의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붉은 돼지>라는 작품 전체의 주인공은 포르코지만, 이 장면 안에서만큼은 피오가 주인공인 셈입니다.
하지만 실제 창작 과정에서 장면을 구성하다 보면 더욱 다양한 양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마녀 배달부 키키>의 #2를 다시 보겠습니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특정한 것을 원하고 행동하는 것은 키키니까 키키가 장면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어떤 변화를 경험하는 쪽은 엄마에 가깝습니다. 키키는 말을 전하고 휙 방으로 올라가는 반면, 엄마는 장면 처음부터 토라 할머니한테 주려고 했었던 약을 마침내 완성해서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면의 초반에는 키키의 엄마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명확하게 소개되지는 않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서서히 알려주기 때문에 장면의 앞부분은 키키가 주도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종합해보면, 키키와 엄마 모두 욕망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경험합니다. 다만 장면의 앞부분에서는 키키의 욕망이 강조되고, 뒷부분에서는 키키 엄마의 변화가 강조됩니다.
(2) 장애 요인과의 대립
또 하나의 장면 안에는 장애 요인들이 있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2의 경우, 오늘 밤 떠나고 싶은 키키에게 장애 요인은, 엄마입니다. 엄마는 왜 라디오를 허락도 없이 들고 나갔느냐며 키키의 이야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오늘 밤 출발하는 걸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토라의 약을 제조하는 중인 엄마의 입장에서도 장애 요인이 있습니다. 키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뜻밖의 선언을 한 탓에 집중하지 못해 약 제조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대립은 가벼운 축에 속합니다. 이 정도 강도의 갈등이 후반부에도 지속되었다면 아마 이야기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갈등은 커집니다. 첫 배달 업무를 받게 되는데 배달물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마을에 정착한 이래 처음으로 파티라는 것에 초대받았는데 초대에 응하려면 배달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급기야는 친구 톰보가 바람에 휩쓸린 비행선에 딸려가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목격하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에 키키는 그런 톰보를 구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갈등은 강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반에 무조건 잔잔하게 시작해야만 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초반도 후반 만큼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를 보십시오. 주인공 아시타카와 재앙신으로 변하는 나고가 대립각을 세우는 것부터 이야기가 출발합니다. 일단 일을 벌려 놓고,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제공하는 형태죠. 구성 방법에 정답은 없습니다. 창작자가 선택한 옵션이 최적의 방식으로 잘 구현된 플롯만 있을 뿐입니다.
(3) 전환점
디지털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픽셀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행동과 반응입니다.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행동과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장면에서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행동 혹은 반응을 전환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환점이 장면을 장면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전환점을 기준으로 그 앞은 전환점을 형성하기 위한 준비이며, 그 뒤는 전환이 일어난 결과를 표현합니다. 이야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강력한 사건을 클라이막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장면 안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을 전환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여러 전환점 가운데 가장 큰 전환점이 클라이막스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ㅠ 그것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녀 배달부 키키>의 #2에서 전환점은 무엇일까요? 키키가 자기 방으로 올라가고, 엄마에 의해 키키가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토라 할머니에게 설명하는 순간입니다. 13살이 되면 마녀가 될 아이는 수련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토라 할머니와 그녀를 지켜보는 감상자들에게 공개되는 것이죠. 사람이 두 다리로 신체를 지탱하는 것처럼, 장면 또한 두 가지의 다리로 자신을 지탱합니다. 하나는 전반부에서 보여지는, 인물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추구해나가는 모습이고, 또 다른 하나는 후반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전환점입니다. 이 전환점에는 창작자가 장면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하는 가치가 담겨져 있습니다. 전환점에 대해서는 원고 단계에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