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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스트적 Aug 21. 2021

청운동 펠프스? 본동의 방수현!

고구동산 스매싱

1.

강희 부모님께 처음 인사를 드리던 날 아버님은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보통은 '좋아하는 운동' 또는 '즐기 운동'이 뭐냐고 질문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내가 운동과는 담을 쌓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수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수영을 오래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담백하게 대답하고 말았어야 했다.


"제 별명이 청운동 펠프스입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풀어보고자 했던 농담이 두고두고 아버님의 놀림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지금도 아버님은 나를 '청운동 펠프스'라고 부른다. 다만 미국 펠프스보다 청운동 펠프스는 어깨가 좁을 뿐이다.


2.

2012년 어학연수를 핑계로 미국에서 신나게 놀았다. 뉴저지주 티넥(Teaneck)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이웃의 초대를 받았다. 5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홀로 앉아 마카로니를 먹고 있었다. 무료해 보이는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이고 미국인과 결혼해 이곳에 정착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탁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I know Timo Boll"


한때 탁구에 심취 적이 있다. 탁구 관련 글을 읽고 영상을 찾아보는 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티모 볼은 독일 탁구 대스타다. 2008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은메달리스트(2012 런던, 2016 리우올림픽에선 동메달)로 견고한 수비가 일품이었다. 자랑을 살짝 보태자면 2017년 5월 독일 뒤셀도르프 세계선수권대회에 풀 기자로 출장을 갔다가 티모 볼을 직접 보는 영광을!


아무튼 독일 아저씨는 내 손을 꼭 잡으며 "really?"를 연발했다. 키 작은 동양인에게서 "티모 볼을 안다"라는 말을 듣게 될 줄 몰랐을 터다. 우리는 파티 내내 탁구 이야기만 했다. 그는 시간 될 때 탁구를 하자고 했다. 신이 난 나는 "I am Korean Timo Boll"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림없다는 듯 내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


3.

동작구 본동 주민들은 배드민턴을 즐기는 모양이다. 동네를 걷다 보면 배드민턴 채를 어깨에 들쳐 맨 사람들이 곧잘 눈에 띈다. 이 작은 동네에 심지어 배드민턴 전문 매장(요넥*)도 있다. 여의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강희와 나는 요즘 본동 고구동산에서 배드민턴 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고구동산 정상엔 배드민턴 코트가 2개 있는데 사람이 없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코트를 노리는 주민들이 많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치다 보니 실력도 많이 늘었다. 이사하고 한 달 정도 지났는데 배드민턴 덕분인지 체중도 줄고 있다.


문제는 '입' 배드민턴이 더 늘었다는 점이다. 스매싱할 때마다 "방수현 스매싱!"이라고 기합을 넣는다. 마치 고등학생 시절 "파리채 블로킹!"이라고 습관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1996 애틀랜타올림픽은 내가 기억하는 첫 올림픽이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 4강전 방수현 vs 수지 수산티(인도네시아) 경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TV 앞에서 "스매싱!" "스매싱!" 그렇게 소리를 질렀더랬다. 방수현은 한국 배드민턴에서 유일한 단식 금메달리스트로 남아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최종 성화 점화 주자 수산티였다!)


하지만 90년대생 강희는 "방수현이 누구냐"고 묻는다. 충격이다.


나는 본동의 방수현이다!

본동 고구동산의 방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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