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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업터뷰

프린트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업터뷰2. 눈치 보지 않고 프린트해도 된다고요?

by 섬감자

필자의 친구이자 현재 공공기관에 재직 중인 [치즈크러스트] 님과의 업터뷰. 그는 성장지향적이고 심심할 땐 자격증을 따는 취미가 있는 동시에 매일 로또만이 답이라고 외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평소, 로또 미당첨자의 로또 구입 금액도 소득공제 되는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 직장에 대해 얘기해줘.

내 첫 회사는 마트였어. 공산품들을 관리하는 공산팀으로 입사했지. 멋모르고 들어갔어.

사건은 입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벌어졌지. 점장이 나한테 프린트를 시켰어. 딱 한 장이었고, 몇 글자 되지도 않는 거였어. 스무 글자쯤? 프린트한 걸 오려서 파일철 이름으로 붙이는 용도였거든. 하라길래 했지.

우리 회사에 직원들 관리하는 팀이 있었는데, 프린트 나온 걸 봤나봐. 갑자기 나한테 오더니 이 정도는 글씨로 쓰지 왜 프린트했냐는 거야. 나한테 프린트시켰던 점장이 그걸 듣더니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더라. 책임을 떠넘긴 거지. 내가 프린트도 눈치 보면서 해야 하는 회사에 들어갔구나. 그때 뭔가 잘못된 걸 느꼈어.

새 신발을 신고 간 날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났어. 내 업무도 아니었는데 마트에서 나온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오라는 거야. 돼지 내장이 가득 찬 음식물쓰레기였어. 핏물이 질질 새고 있었고, 냄새도 엄청났어. 카트에 음쓰를 싣고 분노의 드리프트를 하며 가다가, 웁쓰, 그게 쏟아져 버렸어. 더럽혀진 내 소중한 디스커버리 하얀색 운동화와 쓰레기를 수습하고 나니 현타가 오는거야. 그래서 사직서를 썼어. 사직서 양식도 내가 만들었다? 프린트 값 아까워할까봐 내가 뽑아갔어. 그렇게 제출하고 나가는데, 점장이 따라 나와서 말리더라고. 본인 인사고과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첫 직장과의 연은 그렇게 끝났어.


두 번째 직장 썰도 풀어줘.

더 가관이었지. 행사대행사였어. 어느 회사의 창고를 사무실로 썼지. 내가 차가 없어서 대표님 차를 얻어 타고 다녔는데, 대표님 술 많이 마신 다음 날엔 나도 그냥 쉬는 회사였어.

이 회사는 자꾸 용역사에 날 파견근무 보냈어. 그럼 월급이 적어지는 거야. 사대보험 가입도 안 됐고 계약서도 안 쓰고.. 이게 맞는 건가 싶었지.

어느 날은 골프장에 행사 용역을 갔는데, 새벽 6시에 깨우더니 VIP들 골프가방을 나르라는 거야. 속으로 ‘이건 아니지’ 하면서 옆을 봤는데 다른 직원은 성실하게 나르고 있더라고. 그래서 ‘이 회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생각했지.

그 회사에 다녔을 때가 코로나가 심한 시기였는데 회사가 휘청휘청했거든. 그래서 악재에도 흔들리지 않는 회사를 찾기 위해 공공기관 인턴을 알아보기 시작했어.


지금은 공공기관에서 일한 지 꽤 됐지?

응, 3년 됐지.

지금 회사에 만족하는 첫 번째 이유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거야. 그전까진 없었어. 내가 “저 이 회사 다녀요” 했을 때 아무도 몰라줬거든? 내가 우리 회사에 대해서 두세 번에 걸쳐 설명해야 했어. 지금은 이름을 말하면 ‘거기 다니는구나, 알죠’라고 말해주니까 내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거야. 내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해. 머슴 일을 해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도 있잖아.

두 번째는 복지야. 워라밸이 확실하고 야근이 거의 없어. 웬만하면 일정이 정해져 있어서, 야근도 대충 언제쯤 할 것 같은지 알지.

세 번째는, 내가 프린트 100장을 하든 200장을 하든 괜찮다는 거야. 단 한 글자를 뽑더라도 사업에 필요하니까 뽑을 거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줘. (꽤 한이 된 모양이다.)


그만큼 만족하면 이직할 생각은 없는 거네?

언제든지 생각 있지(음?) 조금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어. 경력과 여기서 배운 걸 발판 삼아서 한 단계 다음으로 올라가고 싶어.


아예 지역을 옮길 생각도 있는 거야?

그럼! 잃을 것도 없잖아. 지금 내가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빚을 크게 낸 것도 아니고. 물론 전세 빚은 좀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동에 제한은 크게 없잖아. 어디든지 기회가 있고 좋은 자리가 있으면 떠날 수도 있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말이야.


직업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은 뭐야?

명예인 거 같아. 이 회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가. 남들도 ‘괜찮은 회사’라고 인정해주는 회사가 좋아. 나는 회사 브랜드 가치가 내 가치가 된다고 생각해. 대학도 ‘나 서울대 나왔어요’ 하면 ‘공부 잘하는 친구네’라고 가치를 알아주잖아? 회사가 그 사람의 스펙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


너에게 직업이란?

진짜 어렵다. 돈벌이도 중요하긴 한데, 스펙업하는 공간? 나는 회사에서 정말 많이 배웠거든. 숫자에 약했는데 많이 알게 됐고, 각종 계약 방법과 행정 처리도 알게 되니까 지식이 많이 늘었어. 이렇게 스펙업해서 다음 단계로 계속 발전해 나가는 거지.

한글이랑 엑셀도 많이 배웠어. 인터넷강의로 들으면 듣기 싫고 재미없잖아. 근데 회사는 실전이니까. 내가 보고서 쓰면서 줄 간격도 맞춰야 하는 거고. 그래야 내가 편하니까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는 거지. 그렇게 배운 걸 기반으로 지금은 자격증을 따고 있어. 정말로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서.


사업을 할 생각도 있어?

아니. 나는 그냥 회사에서 월급 받는 게 안정적이라 좋아. 요즘은 공무원을 준비해 볼까 생각 중이야. 남들이 지금보다 월급이 적어져도 괜찮냐고 묻거든? 그런데 첫째는 안정, 둘째는 인정이라는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게 최종적으로는 공무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왕이면 민원인 덜 만나고 서류 작업하면서 일하는 쪽으로.

난 아무래도 정년까지 일을 할 거 같아. 집에 있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지 않아? 정년까지 일하면서 재테크 공부도 하고. 목돈 모이면 투자하면서 돈을 불리는 거지.


돈을 많이 벌면 뭐 하고 살 건데?

글쎄. 그냥 돈만 많으면 행복할 것 같아. 길거리에 할머니, 할아버지들 나물 파는 것도 다 사드리고, 여행 가서 공항에서 ‘내 캐리어가 안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안 하고. 잔걱정 없이 살고 싶어.


마지막으로,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기본 자격증부터 따세요! 그래야 다양한 취업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때 그 순간]

상식사전 시리즈 은근히 도움 많이 됨!

-치즈크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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