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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12. 2023

내향인의 음주 예찬

Prologue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일 것이다. 따끈따끈 갓 도착한 치킨을 앞에 둔 아빠가 그냥 한 번 마셔보라며 무심코 권했던 보리 음료가 내 생애 첫 술이었다. 톡 쏘고 시원하다는 것 외엔 좀처럼 무슨 맛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아빠는 왜 대체 매일같이 이런 맛 때가리 없는 술을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아빠처럼 꽤 자주 술을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부전녀전인지, 내향인 아빠를 꼭 닮은 내향인 나는 아빠의 음주력마저 닮아버렸다.


솔직히 술이 맛있냐 물으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내 기준에) 와인이나 막걸리, 과실주는 맛 자체로 정말로 맛있는 경우가 많고 맥주는 굳이 맛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시원한 맛에 마시며 소주는 사실 과학 실험실에서 쓰던 알코올 맛에 가깝다(가끔 정말로 달긴 하지만). 어떤 위스키를 마셨을 땐 아스팔트를 녹여 먹는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고 고량주의 맛은 지금도 어떻게 설명하면 잘 설명하는 건지 도무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구역에서는 절대적인 맛이 그리 중요하진 않은 것이, 맛이 있든 없든 그 술을 맛있어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마따나, 술에도 짝이 있다.


그러니 술을 맛으로 마신다는 말은 아무래도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는가. 이 모든 이야기는 다름 아닌 '나는 왜 술을 마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물론 누군가는 알코올 중독이나 알코올 의존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끝내버릴 수 있는 문제겠지만 적어도 한 명의 애주가로서 그렇게 딱딱하게만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날씨나 기분에 따라 생각나는 술이 다르다거나, 어떤 술을 마시면 함께했던 사람이나 장소가 신기루처럼 피어오르는 현상 같은 것을 나름의 낭만으로 말랑말랑하게 논하고 싶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한껏 풀어질 수 있는 시간, 하루 중 유일하게 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오롯한 시간에 대하여. 한 술 한 술, 그렇게 좋았던 술에 대해 아주 사적이게나마 조금씩 엮다 보면 비로소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내가 나를 조금은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전히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를 뾰족하게 알아내지는 못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쓰면 쓸수록 세상엔 참 맛있는(!) 술이 많다는 점만 깨닫고 말았을 뿐(나는 이미 여러 술의 단짝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술과 그리 친하지 않은 비음주자라면, 음주를 권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미 술의 참맛을 알아버린 당신이라면 우리 이왕 마실 것 신명 나게 마셔보자 말하고 싶다. 술 마시는 데 이유 없고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에 대중없듯, 이 이야기는 떠다는 공기마냥 별 목적도 방향도 없다. 그저 부디 가벼운 안주 삼아 봐주시면 좋겠다. 내향인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고, 취중담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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