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피노누아, 대학동기 H네 집들이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심리학 책에서 말하는 공통사항이 하나 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라는 것. 나를 진정으로 아껴야만 남에게도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것. 그래, 그래야지 싶다가도 와인을 딸 때면 꼭 망설여진다. ‘그냥 혼자 마시는 건데, 뭐’ 하며 곧잘 일말의 자기애를 포기하기 일쑤다. 특별한 날 진짜 맛있는 안주랑 마셔야지, 고이 쟁여둔 와인을 놓고 결국 마시다 만 아무 와인이나 따고 마는 나는 그 순간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지 못한다. 새삼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애정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술자리에 나는 곧잘 피노누아를 가져간다. 전통적으로 보자면 피노누아 하면 프랑스 브루고뉴겠지만, 요즘 내 입맛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치우쳐 있다. 어느 와인샵엘 들렀다가 “미국 와인은 참 상업적이에요. 입에 아주 착착 달라 붙거든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마시다 보니 정말로 그렇다. 프랑스의 피노누아가 멋지고 고상하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 같다면, 미국의 피노누아는 누구나에게나 친근하고 만만한 순둥이 같다. 어떤 안주와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둥글둥글한 성향은 아무리 겪어도 질리지 않는다. 고로 데일리로 마시기에 손색이 없겠지만, 혼자 따기는 또 좀 그런 게 그도 나만큼이나 분명 좋아할 테니까. 틀림없이 맛있을 와인 몇 병을 차곡차곡 쟁여 두고는 그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것. 피노누아를 대하고 즐기는 나만의 방식이다.
지난 주말, 대학 동기 H의 집들이에도 캘리포니아 피노누아 한 병과 동행했다. 갓 독립한 그녀와 나눠 마시고 싶은 와인은 ‘브레드 앤 버터Bread & Butter’, 나파Napa산. 여리여리한 바디감에 쫀득하게 감기는 느낌이 참 우리에겐 딱이다. 곱창 전골, 딸기, 알새우칩으로 넘어가는 알 수 없는 안주 전개에도 흔들림 없이 잘 어울리는 넌 역시나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낮부터 시작된 '짠'은 결국 저녁을 맞았다. 영어에서 브레드 앤 버터는 우리네 밥줄(소득원)과도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고 하더라, 하며 슬렁슬렁 이어진 이야기는 실상 우리네 밥줄 이야기로 흘러들어가고. 늘 그랬듯 당장 거창한 답은 없지만 그런들 뭐 어때, 지금 우리의 눈앞엔 독립이라는 자유, 그리고 피노누아가 이리도 찰랑이는 것을.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얼큰하게 돌아서는 길. 찬바람도 그럭저럭 맞을 만한 걸 보니 겨울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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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드 앤 버터, 그외 괜찮았던 가성비 미국 피노누아
브래드 앤 버터 피노누아 Bread & Butter, Pinot Noir
-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3만원대 중반
- 가벼운 바디감에 약한 탄닌감, 부드러운 목넘김 등 전반적으로 밸런스가 훌륭하다. 피노누아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호불호 없이 먹힐 만한 와인.
서브미션 피노누아 SUBMISSION, Pinot Noir
- 미국 캘리포니아, 2만원대
- 브레드 앤 버터보다는 바디감이 좀 있는 편이며 드라이하고 탄닌감은 적다. 부담 없는 가격대와 대중적인 맛으로 높은 판매량을 자랑하는 피노누아.
롱반 피노누아 Long Barn, Pinot Noir
- 미국 캘리포니아, 1만원대
-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에 비해 비교적 높은 가격대에 많이 포진해 있는 피노누아를 감안했을 때 1만원대로(혹은 가끔 그 이하로) 구할 수 있는 가성비 갑 와인. 아주 특별한 마력을 갖고 있기보다는 집에 몇 병 쟁여두고 가볍게 마시기 좋은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