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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11. 2023

1등이 아닌, 세상 모든 것을 위하여

프랑스 메를로, 꿀꿀한 가을날의 식탁




돌이켜보면 내 안에는 늘 마이너한 성향이 깔린 듯하다. 최고의 것, 주류(main stream), 1등에 그리 열광하지 않는다. 남들이 다 하는 걸 굳이 따라하고 싶지 않은 성미일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 천만 영화의 성화에 버티고 버티다 친구가 같이 보자고 몇 번을 졸라대면 마지못해 보곤 했다. 겨울이면 모두가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블랙 롱패딩을 사지 않았다. 나까지 응원을 보태지 않아도 될 1등 야구팀보다는 처절하게 싸우는 하위 랭킹의 팀을 응원한다. 영화 <모차르트>를 볼 때마다 살리에르의 감정에 심히 이입한다. 학창시절 모든 반 친구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아이돌이 아닌, 당장 인기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볼매인 배우를 이상형으로 꼽았다(그는 지금 꽤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되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탕후루는 한 번도 사먹은 적이 없다.


레드 와인을 고를 때는 카베르네 소비뇽보다는 메를로다.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함께 레드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이지만, 흔히 사람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레드 와인 품종을 말하라면 열에 여덟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꼽을 것이다. 그러니까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존재감에 가린 2인자 아닌 2인자 같은 느낌이 (적어도 나에게는)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카베르네 소비뇽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약간은 이러한 연유로 늘 메를로를 속으로는 더 좋아했던 것이 분명하다. 메를로는 어느 하나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한 와인이라 어느 음식에나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마치 본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전교 1등에 비해 조금은 설렁설렁 주변을 살필 줄도 아는 2등처럼. 모두가 주연 배우만을 주목할 때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는, 유연하지만 강직한 조연처럼.





안타깝게도 오늘의 나는 그 어떤 곳에서도 주연이 되지 못했다. 메를로가 생각나는 날이다. 배달 앱을 켜고 손가락을 놀리며 집에 묵혀둔 메를로 한 병을 미리 따 놓는다. 그러고는 새삼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태어난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모를 나의 마이너적인 성향에 대하여. 어쩌면 살면서 수없이 겪는, 메이저가 되지 못하는 상황들 속에서 일종의 질투와 열등감으로 삐딱선을 타고 있는 건 아닌지. 무튼 무지 꿀꿀한 날이다. 띵똥. 주문한 마라샹궈가 다행히도 줄줄이 소세지 같은 생각을 끊어냈다. 아싸, 중국 당면 서비스 당첨. 기념으로 일단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 '마'하고 '라'한 맛에 한 잔 더 치얼스. 안주가 얼마나 화끈하든 말든, 역시 메를로는 어김없이 너그럽고 곰살맞다.

밤공기와 접촉한 와인의 맛이 시간이 지나며 부드럽게 열리고 있다. 오늘의 끝,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이 세상 1등이 아닌 모든 것들을 위하여 또 한 잔 더 치얼스. 딱 반 병만 먹자던 이른밤의 결심이 아름답게 무너진다. 찬란하게 깊은 밤이다.




오늘 꿀꿀한 나를 위로한 한 병의 메를로


투썩 점퍼 메를로 TUSSOCK JUMPER, MERLOT

- 프랑스, 13.5%

- 여리여리한 미디엄 바디, 베리향이 나는 프루티한 스타일, 부드러운 목넘김

- 1만원 초중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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