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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15. 2023

일요일의 말벡에서 깨달은 것들

아르헨티나 말벡, 일요일 저녁



토요일이었는데 일요일이다. 다이아몬드 같은 주말을 온종일 잠에 뺏겼다. 이번주는 유독 힘에 부친 한 주였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었던, 그런 날들.그래도 예전엔 주말이 아까워서라도 기어코 밖엘 나가곤 했는데. 침대에서 도저히 떨어지질 못하는 내 몸뚱아리를 보며, 유쾌하지는 않지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이 비단 체력 뿐이랴.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예전에 좋아하던 옷 취향, 사람과의 관계 예전 같지 않다. 뭐 하나 끝장을 보겠다던 일에 대한 열정 같은 것도, 평생 취미라 여겼던 것들에 대한 애정도 희미해졌다. 초록색이 부쩍 좋아졌다. 종류 불문하고,식물이 애틋해졌다는 점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빼박 증거일 것이다(아직 카톡 프로필 사진을 꽃으로 해놓지는 않았지만).


와인 취향도 조금 변했다. 한때는 묵직한 아르헨티나 말벡을 참 좋아했던 적이 있는데, 언젠가부터 그 묵직함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입맛은 무거운 데서 가벼운 곳으로 옮겨왔다. 요즘은 너무 강직하고 무거운 바디감의 와인보다는 피노누아 같은 옅고 여리여리한 와인에 더 손이 간다. 안주 취향도 사뭇 달라졌다. 예전엔 치즈와 빵이면 만사 오케이였지만 이제는 꼭 메인 메뉴가 필요하다(치즈와 빵을 너무 많이 먹어서일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한다는 진리를, 한결 같을 줄 알았던 입맛도 술 취향도 빗겨갈 수는 없었나 보다.




일요일 오후. 집에 남은 와인이 하필이면 말벡 두 병 뿐이다. 추석선물로 받은 이후로 따지 않고 묵혀뒀던 것들이다. 스테이크나 양고기 같은 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엄마가 끓여보낸 돼지고기 김치찌개 뿐이다. 그렇다고 와인을 사러 나가거나 고기를 구할 힘은 없으니 그냥 먹고 마시는 걸로. 김치찌개와 함께 도착한 열무김치와 부추 무침, 고추 장아찌도 아무렇게나 접시에 덜어낸다.


보글보글 끓어오른 김치찌개 옆에 와인을 따른다. 말벡은 여전히 말벡, 한결처럼 중후하고 진지하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와의 조합이 아무래도 희한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다. 부담스러울 것만 같았는데 막상 마시다보니 또 그것대로 풍부한 매력이 있다. 그래, 나는 말벡의 이런 면을 참 좋아했었지.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음식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옷도 지금 다시 보면 생각만큼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며 나를 더 확고하게 알아가고 있다는 자만심에, 많은 것들에 너무 인색해져버린 건 아닐까. 덮고 지내던 취미와 한동안 연락을 끊긴 지인도 문득 떠오른다. 출근을 앞둔 일요일 치고 매우 너그러운 순간이다.




오늘의 말벡


까테나 자파타 알라모스 말벡 ALAMOS, MALBEC

- 아르헨티나 멘도자, 14%

- 1만원대 중반

- 아르헨티나 말벡 특유의 묵직함, 짙음, 매우 드라이한 편.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시다보면 실시간으로 부드러워지는 말벡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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