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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Jan 19. 2023

비빌 언덕이 필요한 날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동네 와인샵




뭐든 믿는 구석이 있을 때 맘이 편한 법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 와인샵. 난생 처음 보는 낯선 라벨들이 도열한 화이트 와인 코너 앞에서의 얘기다. (마신 것에 비하면) 와인을 아주 잘 알지는 못하는 나에게 소비뇽 블랑, 그중에서도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지금껏 실망을 안겨다준 적이 거의 없었다. 기나긴 장마를 핑계로 공연히 흘려보내버린 여름날에도, 지구상에 혼자 남은 것만 같았던 헛헛한 가을밤에도. 입안이, 그보다는 마음이 깔깔한 날. 더이상 나의 그 어떤 세포도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날엔 어김없이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고른다.


잔디의 풋풋한 풀내에 시트러스 향이 감도는 이 한 모금이 이렇게도 기특하니 말이다. 호로록. 입술로 빨아들여 목구멍으로 정성껏 넘겨보낸 한 모금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위장을 지나, 화끈거리는 마음을 사르르 소독해주는 것 같다. 이때 곁들임 영상은 스토리가 복잡한 영화보단 이미 너댓번은 더 봐서 다음 장면이 눈에 선한 영화가 좋다. 그럼 비로소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 그리고 소비뇽 블랑, 우리 둘일 수 있으니까. 새우나 연어 같은 초특급 조연이 있다면 좋겠지만 냉장고에 잠자고 있는 치즈나 올리브 쪼가리면 뭐 어떻고, 경험상 캔참치나 엄마표 잔멸치 볶음도 은근 감초다. 익숙한 OST를 타고 이 녀석 아주 소비뇽, 하고 블랑, 하며 온 핏줄을 타고 묵직하게 밀고 오면 그래. 바로 이거지. <신의 물방울>의 한 장면처럼, 나는 어느새 가보지도 않은 뉴질랜드의 어느 포도밭 언덕 한가운데 서 있다.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위태한 하루를 보낸 이에게 단 한 잔의 술을 권하라면 나의 답은 언제나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일 것이다. 소주, 위스키, 그 어떤 술도 이 녀석만큼 청명하게 기분을 달래줄 리는 없을 테니. 온 세상이 냉동 창고 같은 한겨울에도 레드보다는 화이트라며 동네 와인샵 냉장고 앞에서 기웃대는 날이면,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비빌 언덕을 찾고 있을까 싶다.


P.S. 소주나 위스키는 따로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으로. 치얼스.




Today's Recommended

오늘 당장 가볍게 마시기 좋을 가성비 와인



푸나무 소비뇽 블랑 POUNAMU, Sauvignon Blanc

- 뉴질랜드 말보로, 2만원대

- 소비뇽 블랑 특유의 풀향이 잘 느껴지면서도 살짝의 단맛도 감도는 편이라, 아주 드라이한 조금은 부담스러운 화이트 입문자에게 추천.


킴 크로포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 KIM CRAWFORD, Marborough, Sauvignon Blanc

- 뉴질랜드 말보로, 2만원대

-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하면 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라벨. 상큼한 첫 모금의 순간부터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될 것. 화이트 와인이야 웬만하면 늘 해산물과 궁합이 좋지만, 킴 크로포드는 특히나 찰떡이다.


바비치 블랙 라벨 말보로 소비뇽 블랑 BABICH Black Label, Marborough, Sauvignon Blanc

- 뉴질랜드 말보로, 2만원대

- 소비뇽 블랑의 시트러스향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와인. 적당한 바디감과 산도, 부드러운 목넘김,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무난하고 둥글하다.


말보로 릿지 소비뇽 블랑 Marbourough Ridge, Marborough, Sauvignon Blanc

- 뉴질랜드 말보로, 1만원대

- 가성비로 말하자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열대과일의 풍미와 함께 약간의 단맛이 느껴지는 듯하지만, 바디감이 가벼워 오래 머무르진 않는다. 중식 같은 기름진 안주와 함께라면 느끼함을 싹 잡아줄 일등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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