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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Jan 25. 2023

추억의 잔재를 안주 삼아

독일 리슬링, 입호펜




바야흐로,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입호펜(Iphofen)라는 소도시. 코로나가 덮치기 전, 관광객이 붐비지 않는 이 고요한 마을의 와이너리에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엄청난 행운이었다). 리슬링이라는 품종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이곳에서였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된다는 화이트 품종, 리슬링은 당시의 나에게는 매우 생소했는데 그 맛이 또 아주 희한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꽃향과 과일향이 공존하는 가운데 쿰쿰한 기름 냄새 같은 것이 와인에서 나는 것이다. 뭐랄까 그것은 꼭, 어릴 적 멋모르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동네 소독차가 뿜어내던 냄새 같기도 하고(매번 따라다녔던 걸 보면 그때도 그 냄새가 싫지 않았나 보다). 잘 숙성된 리슬링에서는 실제로 휘발유 향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고, 당시엔 그것이 정말 휘발유인지 뭔지에 대해선 별 개의치도 않은 채 나는 잔을 홀짝홀짝 비워냈다. 산뜻하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고 화려하기보다는 청초한 그 느낌이 마냥 좋아서. 그렇게 리슬링은 단숨에 나의 최애 화이트 품종으로 떠올랐다.





그러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리슬링병을 앓았지만, 어쩐 맘에서인지 정작 애써 찾지는 않았다. 늘 마시던 소비뇽블랑이나 샤도네이를 그대로 묵묵히 마실 뿐. 친구들에게 리슬링 돌림 노래를 부르고는 다녔지만 더이상의 정보를 검색하지도 않았다. 애정이 식었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두고 싶었던 맘이었던 것 같다.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만날 연인처럼, 그 좋았던 기억을 다른 어떤 무엇으로도 덮고 싶지 않은 마음처럼.그리고 가끔 하는 거라곤, 인생 중 단 한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그 포도밭에서 마신 리슬링을 택할 지도 모르겠다는 식상한 공상 정도다. 그러다 얼마 전에 리슬링을 한 병 선물 받았다. 이걸 따, 말아 하도 고민이 되어 쓰여지고 있는 글이다. 


다시 만날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 한편에는, 그때 그 좋았던 감정이 과연 지금도 그대로일까 하는 걱정이 도사리고 있다. 포도밭에 불던 바람, 치즈의 꼬리꼬리함과 부스스 부스러지던 브레드 스틱의 질감까지. 그때의 그 무엇도 없는 우리집 거실 테이블, 나는 리슬링이 여전히 좋을까. 그치만 오늘은 용기를 내보겠다. 밤공기도 조금 훈훈해진 것이, 리슬링을 따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다. 안주는 딱히 마땅찮지만 크게 상관은 없다. 여행지, 와인, 사람, 그 모든 추억의 잔재들이 더없는 안주가 되어줄 테니.


늘 그랬듯이 재회의 맛은 짜릿한 법이다.




P.S. 다시 만나도 좋을까 싶은 인연은 다시 만나봐야만 알 수 있는 법이다.




Wish List

언제 마셔 봐야지, 오다가다 모은 리슬링 위시 리스트


된호프 리슬링 트로켄 Donnhoff Riesling Troken

- 나헤 Nahe, 4만원대

- 독일 나헤 지역에서 가히 전설로 불리는 된호프 와이너리의 명작 중 하나. 영롱한 금빛을 띄며 시트러스, 자몽, 레몬 등 과실 특유의 상큼함을 한껏 머금고 있으며 마치 탄산이 들어가 있다고 느껴질 만큼 산뜻하며 드라이한 편.


마르쿠스 몰리터 MARCUS MOLITOR

-  모젤 Mosel, 포도밭 밑 포도 품종에 따라 가격 상이

- 20세의 나이에 8대째 이어져오는 가업을 물려 받아 와이너리 경영을 시작한 마르쿠스 몰리터의 혼이 담긴 와인 미국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 100점을 3번이나 받은 이력과 함께 스타 라벨로 떠올랐다. 아우스레제 Auslese, 벨레너 Wehlener 등 종류에 따라 스타일이 다양하다.


클레멘스부쉬 리슬링 마린버그 슈페트레제 Clemens Busch, Marienburg Spatlese

- 모젤, 10만원대

-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와인 애호가 한해가 마신 와인으로 유명해졌다. 꽃향과 더불어 잘 익은 과실향, 꿀향 등과 적당한 산도가 어우러져 디저트 와인으로 활용하기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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