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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Feb 07. 2023

킬케니는 킬케니 같다

킬케니, 아일랜드 킬케니





지역의 술이 그 지역을 닮는다고 한다면, 그렇다에 한 표다. 칭따오는 칭따오 같고, 하노이는 하노이 같으며 사이공은 사이공(호찌민의 옛 이름) 같다. 창(Chang Beer)은 태국 같고 스텔라는 벨기에 같으며 버드와이저는 미국 같다. 그리고 킬케니는 킬케니 같다. 아일랜드 킬케니의 한 펍에서 킬케니 맥주를 홀짝이며 나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때는 호기롭던 어학연수생 시절.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지내던 어느날, 어쩐 일에서였는지 문득 킬케니엘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더블린에서 버스로 1시간 반 남짓 버스를 타고 가야했지만(집순이에겐 큰 행보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킬케니가 '내 스타일'임을 직감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변과 아치형 다리, 호숫가에 놀던 백조 가족, 킬케니성(Kilkenny Castle), 무심하게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까지. 모든 것이 한적하고 유유하다. 길치라서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지도도 없이 골목을 거닐어도 좋을 정도로 아담한 동네다. 출출하면 눈에 보이는 동네 펍에 들어서는 게 또 급여행의 묘미 아니겠나. 오후 4시쯤, 이미 이 구역 아저씨들의 비어타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킬케니에선 킬케니지, 아저씨들의 손에 든 파인트를 일일이 살피며 나도 덩달아 킬케니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킬케니 맥주의 첫인상은 킬케니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기네스의 진한 흑빛과는 달리 옅고 붉은 갈색빛에, 거품은 기네스만큼이나 섬세하지만 쓴 맛이 덜해 목넘김이 한층 보드랍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롭고 살가운 느낌. 기네스가 더블린을 닮았다면, 킬케니는 킬케니를 닮았다. 맥주 한 입, 감자튀김 한 입을 거듭 반복하다 어느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민망해하며 어둑한 강변을 거닐다 다시 버스에 올랐던 기억. 별 거 없다면 별 거 없었던 킬케니에서의 하루가 별스럽게 오래도록 남은 것은 킬케니 맥주 첫 모금을 마셨을 때의 그 신선함 때문이기도 하겠거니.





미각은 꽤 오랜 기억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킬케니(마을과 맥주 둘 다)의 맛이 마치 지난 달 일처럼 이토록 선연한 걸 보니. 외장하드에 고이 잠자고 있던 그날의 사진을 들춰보다가, 냉장고에 남은 맥주가 없나 공연히 기웃대다가. 다행히(!) 딱 한 캔 남은 맥주를 따며 내가 만약 하나의 지역이라면? 그곳에서 나는 술은 어떤 술일까 하고 문득 상상해본다. 마지막 한 캔이니 급하지 않게, 천천히 조금씩 잔을 비운다. 강한 한 방보다는 은은하게 잔상을 남기는, 나의 도시와 나의 술은 어쩜 킬케니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며.




킬케니 맥주 Kilkenny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기네스와 함께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맥주다. 14세기부터 이어져온 킬케니 성 프란시스 수도원의 전통 양조법을 계승한 아이리쉬 크림 에일로 알려져 있다. 붉은 빛깔에 풍부하면서도 깔끔한 맛, 풍성한 거품이 특징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어쩌다 발견한다면 우선은 집어들고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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