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 X 아만다 로사도 데 라그리마
SNS 속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대한 한줄평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색감이 아름다운 영화, 당신을 자라게 해줄 푸르른 영화, 영상미가 돋보이는 영화, 순수한 아이의 시선이 담긴 영화 등등. 여기에 발랄한 색감의 영화 포스터나 스틸샷이 더해집니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 영화를 두고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 편 ‘매직 캐슬’에 사는 귀여운 6살 꼬마 ‘무니’와 친구들의 디즈니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라고 소개하고 있고요.
뭐, 하나 하나 뜯어 보면 전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 속 무니는 세상 귀여운 6살입니다.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매직 캐슬에 살며, 주변 친구들과 매일 신나는 모험을 떠나고요. 하지만 이름만 그럴 듯한 매직 캐슬은 사실은 역한 오줌 냄새가 나는 엘레베이터에 방에서는 빈대가 나오는 싸구려 모텔이죠. 무니의 엄마는 매주 집세에 쫓기며, 무니와 친구들은 디즈니월드를 코앞에 두고도 가지 못해 매일 거친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열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함축한 한줄평을 그동안 보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 본 날, 저는 크게 사기를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와르르 무너졌거든요. 산뜻한 화이트 와인과의 페어링도 당연히 망했습니다.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라 보는 내내 어딘가 불편한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아역 배우의 미친 연기력에 몇 번이고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요. 여기에 마땅한 와인을 찾는 것이 최상급 난이도로 어려웠습니다. 화사한 화이트 와인이나 우아한 레드 와인은 사치스러웠고, 그렇다고 무겁고 거친 와인을 매칭하기에는 무니와 친구들의 깔깔거리는 밝은 웃음과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엔 역시 소주가 답인가 싶었는데, 약 3년 만에 이 영화와 비슷한 뉘앙스를 가진 내추럴 와인을 발견했습니다. 가르나차 틴토레라 품종의 내추럴 로제 와인, '아만다 로사도 데 라그리마(Amanda Rosado de Lágrima)'입니다.
맑고 경쾌한 루비색을 띄는 이 와인, 영화 포스터처럼 밝은 색감이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보기와 달리 구수하면서도 쿰쿰한 비료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포도씨를 씹은 듯 떫고 까끌까끌한 질감이 이어집니다. 누군가는 절대로 하룻밤도 잘 수 없다는 쪽방에서 겨우 지내는 빈곤층 사람들, 남의 차에 침을 뱉고 빈 집에 불을 지르고도 죄책감을 모르는 아이들, 방세를 내기 위해 6살짜리 딸을 욕실에 두고 매춘하는 엄마 등등 너무 심각한 일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펼쳐져 충격적이지만, 꼭 어딘가에 실제할 것만 같아 조금 불편한 장면들처럼요. 그렇다고 마시기에 거슬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와인 그 자체로는 인위적인 것 없이 내추럴 와인의 본 모습을 잘 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래 지속되는 경쾌한 산미는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싱그러운 웃음을 가진 아이들을 닮아, 우려했던 이질감은 없었고요.
다만 영화의 열린 결말은 찝찝함으로 남았습니다. 부모의 보살핌 아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라도 부디 주변의 따뜻한 도움을 받아 쓰러지지 않고 잘 성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만, 왠지 그렇지 못할 것만 같아서요. 영화보다 더한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에서의 추측은 이렇게나 현실적이라 먹먹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할 이야기를 앞에 두고, 너무 근사한 와인을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주를 부르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그저 꾸밈 없이 자연스럽길 바랍니다.
2024.08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개봉ㅣ2018, 미국
감독ㅣ션 베이커
출연ㅣ윌렘 대포(바비), 브루클린 프린스(무니), 브리아 비나이트(핼리)
한줄평ㅣ내가 아는 누구는 이 영화를 보고 '이래서 학군이 중요하다'며 몸서리를 쳤는데, 나는 그 말에 몸서리를 쳤다
아만다 로사도 데 라그리마 (Amanda Rosado de Lágrima 2020)
산지ㅣ스페인 카스티야 이 레온
품종ㅣ가르나차 틴토레라(Garnacha Tintorera)
도수ㅣ13.5%
특징ㅣ쿰쿰한 흙내음, 누룽지, 산딸기, 체리, 감귤, 라즈베리, 쨍한 산미
가격ㅣ4만원대
한줄평ㅣ포도씨를 오도독 씹은 듯 독특한 질감의 내추럴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