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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이탈리아와 미국 사이 그 어디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X 14 핸즈 샤도네이


구멍날 듯 구멍나지 않는 쫄깃한 반죽 위에 오렌지 만한 모짜렐라 치즈가 숭덩숭덩 올라가 있는 피자. 이탈리아 피자는 평소 저의 인스타그램 추천 피드에 자주 뜨는 단골 소재 중 하나입니다. 물론 제가 화덕 피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피드에 자주 뜰 일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제가 이 영화를 몹시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합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이 영화를 단 한 문장으로 소개하자면 이탈리아에서 먹고, 인도에서 기도하고, 발리에서 사랑하는 이야기인데요. 고로 저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와 같은 먹음직한 장면들은 거진 영화 초반부, 이탈리아에 집중 포진되어 있습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스틸컷. 이탈리아어로 멋지게 주문하기 성공


이탈리아로 건너가 제대로 먹어보기로 맘먹은 주인공은 30대 뉴요커 리즈(줄리아 로버츠)입니다. 남들이 볼 땐 부족함 없이 번듯한 직장에 남편, 집까지 모든 걸 갖춘 그녀지만 정작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점점 그녀의 일상에 드리우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일상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 하나마저 툭 떨어진 것 같은 절망감을 경험한 후로 리즈는 모든 걸 내려놓고 1년간의 여행을 떠납니다. 그녀의 첫 번째 여행지, 바로 이탈리아입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리즈는 그동안 그녀를 옭아매던 속박을 모조리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듯 하고 싶은 것을 거침없이 실행합니다. 열의를 다해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화날 땐 힘껏 소리를 지르고, 웃길 땐 세차게 웃고,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으면서요. 그동안 배운 이탈리아어로 로마의 한 레스토랑에서 멋지게 음식을 주문해내는 장면은 저의 최애 장면 중 하나입니다(언젠가 스페인에서 스페인어로 음식을 주문하겠다며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있는 저입니다). 친구와 함께 나폴리의 피자집에 갔다가, 살 찔까 봐 먹기를 망설이는 친구에게 “뱃살은 복부인격"이라며 무심하게 피자를 오물거리는 장면은 저의 최애 장면 2고요. 그렇게 두둑해진 배로 둘이 사이좋게 옷 가게로 가서 큰 사이즈의 바지를 고르는 전개에도 적잖은 쾌감이 있습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스틸컷. 나폴리에서 피자 앙


이쯤 되니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들끓습니다. 나폴리식 화덕 피자를 먹고 싶지만, 냉장고를 뒤져 발견한 건 얼마 전 배달해 먹고 남은 미국식 피자 뿐이지만요.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지 싶어 올리브 몇 개와 하드 치즈, 그리고 (이탈리아 피자집에서는 절대 허용하지 않을) 피클과 할라피뇨도 꺼냈고요. 와인은 (역시 이탈리아에선 마다할지도 모르는) 미국 샤르도네, ‘14 핸즈(14 Hands)’로 골랐습니다. 개인적으로 미국 샤르도네 특유의 느끼함에 가까운 미끄러운 질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와인은 마냥 버터리하지만은 않고 그에 못지 않은 상큼함이 받쳐줍니다. 피자의 풍미를 살릴 만한 적당한 버터향, 그리고 혀끝을 치고 오르는 산미가 입안의 기름기를 싹 없애더군요. 상을 차리고 보니 이탈리아보다는 어째 미국에 더 가까워진 것도 같지만 오늘 저의 테마는 영화 속 리즈처럼 ‘뭐든 제 멋대로’입니다. 그리고 피자야말로 이탈리아와 미국의 필연적 연결 고리가 아닐까요?


비록 오늘은 ‘먹고(Eat)'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만, ‘기도하고(Pray)’ ‘사랑하라(Love)’로 이어지는 장면 하나 하나에 공감 구간이 참 많은 영화입니다. 하루하루 어떻게 굴러가긴 하는데 과연 잘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 이게 내가 정말 원하던 게 맞나 싶은 허탈감이 밀려올 때 어김없이 생각이 나죠. 사실 ‘왜 살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같은 거대한 질문들에 답이 당장 또렷하게 내려진 적은 잘 없지만 가끔은 아주 단순한 해답이 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날 좋아하는 장면을 맘대로 돌려보고, 맛있는 와인에 양껏 환호하며 (미국식) 피자에 피클도 맘껏 먹었지요. 어디까지나 뱃살은 인격입니다.



2024.09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

개봉ㅣ2010, 미국

감독ㅣ라이언 머피

출연ㅣ줄리아 로버츠(리즈), 하비에르 바르뎀(펠리프)

한줄평ㅣ이탈리아도 이탈리아지만, 이 영화로 인도네시아 우붓의 여행객이 15.67% 쯤은 늘었다고 확신한다


14 핸즈 샤도네이 (14 Hands Chardonnay)

산지ㅣ미국 워싱턴, 콜롬비아 밸리

품종ㅣ샤르도네 위주, 그 외 마르산느(marsanne) 등

도수ㅣ13.5%

특징ㅣ버터, 바닐라, 서양 배, 멜론, 시트러스 계열

가격ㅣ2만원대

한줄평ㅣ미국 샤도네이는 느끼하다는 편견을 버릴 것. 버터리함과 상큼한 산도의 환상적인 밸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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