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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치킨을 시켜놓고 치킨 먹방을 보듯

<줄리 & 줄리아> X 피치니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하늘은 높아졌고, 저는 먹고 싶은 게 많아졌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과 제 식욕에는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요. 가을이면 한껏 왕성해지는 식욕 덕분에 냉장고만 다이어트 각입니다. 하루는 아예 작정을 하고 냉동실에 아껴둔 엄마표 소갈비찜(엄마, 고마워요!)을 꺼내어 영화 <줄리 & 줄리아>를 보며 먹기로, 다소 과하게 치밀한 저녁 식사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확의 계절, 결실의 계절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입 터짐’을 준비하는 의식이랄까요. 


이번에 함께 마실 와인은 영화의 분위기나 흐름보다는 당장 입을 즐겁게 해줄 소갈비찜과 어울리는 와인에 집중하기로 했는데요. 저는 간장 베이스의 음식에 매칭할 와인을 찾기가 어려워 와인 커뮤니티에 ‘소갈비찜에 어울리는 2~3만원대의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는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하루 사이에 9개의 댓글이 달렸고, 저는 와인 애호가들로부터 확신의 와인 리스트 28개를 얻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언급된 2개 와인 중 원스 어폰 어 와인의 감자님과 와인숍 직원의 공감도 얻은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가 소갈비찜 옆에 올랐습니다. 저는 소갈비찜과 <줄리 & 줄리아> 조합에 이만큼 진심이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먹는 데 진심인 줄리와 줄리아를 만나러 가는 길, 이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보나뻬띠!


<줄리 & 줄리아>는 먹는 게 제일 좋아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한 전설의 셰프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와 수십 년이 지나 줄리아의 레시피에 도전하는 줄리(에이미 아담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에는 두 사람이 프랑스 음식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는 장면이 정말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저는 그중에서도 줄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 요리라고 극찬한 뵈프 브루기뇽을 보며 입맛을 다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은 뵈프 브루기뇽 안에 쏟아 넣은 브루고뉴 피노 누아가 더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뵈프 브루기뇽을 먹어볼 일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 맛을 잘 몰라, 비주얼은 얼추 비슷한데 ‘아는 맛’인 소갈비찜을 떠올렸던거고요. 언젠가 소갈비찜을 먹을 때 이 영화를 보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조합이었습니다. 치킨을 시켜놓고 치킨 먹방을 보는 것과 같은 취지라고 볼 수 있죠. 


세상에는 <줄리 & 줄리아>처럼 ‘입 터짐 주의’ 경고가 필요한 영화들이 여럿인데요. 그중에서도 최근 이 영화를 꺼내어 본 건 단순히 식욕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줄리와 줄리아,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보며 마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요리라는 도전을 즐길대로 즐겨버린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결실을 맺고야 맙니다. 물론 여기에 성실함과 꾸준함이 힘을 보탰겠죠. 365일 동안 매일매일 줄리아의 524개 레시피 도전기를 블로그에 써보겠다던 줄리의 다짐. 한 달에 두 번은 꼬박꼬박, 영화나 드라마와 함께 하면 좋을 와인에 대해 한 번 떠들어보겠다던 저의 다짐에 묘한 동질감이 번집니다. 월 2회 마감에도 헉헉거리며 어떨 땐 안 보고도 본 척, 안 마시고도 마신 척 써도, 아직은 누가 알까 싶은 마음도 줄리에게 들켰고요. 어쩌면 저는 요즘 소갈비찜에 대한 식탐보다 약속(마감)을 지키는 건 누구든 쉽지 않다는 공감을 얻고 싶은 마음이 컸나 봅니다. 


그래서 소갈비찜에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는 어땠냐고요? 은은하게 매콤한 후추, 정향과 같은 향신료의 맛이 소갈비의 기름기를 굳건하게 잡아줬고요. 가죽, 카카오닙스와 같은 텁텁함 안에도 베리류의 과실향이 잘 어우러져 밸런스가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와인과 페어링하기에 그 어렵다는 간장 베이스의 음식을 기죽지 않게 받쳐줬으니 얼마나 고마워요. 줄리와 줄리아가 흔들릴 때마다 곁에서 칭찬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남편들처럼 말이에요. 그나저나 저, 와인을 찾아가는 부산스러운 과정이 즐거웠던걸 보면, 저도 정말 원스 어폰 어 와인을 즐기고 있는거 맞겠죠? 혹시 소갈비찜에 어울리는 와인 리스트가 더 필요한 분들을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onceuponawine_letter)을 남깁니다. 여러분, (...) 거기 계시죠? DM 주세요! 



2024.09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줄리 & 줄리아 (Our Souls at Night)

개봉ㅣ2009, 미국

감독ㅣ노라 애프론

출연ㅣ메릴 스트립(줄리아 차일드), 에이미 애덤스(줄리 포웰)

한줄평ㅣ꾸준함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피치니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Piccini Primitivo di Manduria)

산지ㅣ이탈리아, 만두리아

품종ㅣ프리미티보

도수ㅣ14.5%

특징ㅣ후추, 정향 등 매콤한 향신료 베이스에 블랙베리, 체리 등 베리류의 아로마가 은은하게 퍼지는 와인

가격ㅣ1만원대

한줄평ㅣ육류 요리를 위한 와인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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