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남녀> X 페데리코 파테르니나 까바 브뤼
얼마 전 엄마와 동생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셋이 함께 떠난 유럽여행인지라 서로가 서로를 많이 의지했고, 맛있는 파스타와 피자, 와인을 매일 먹고 마시며 애틋한 시간을 보냈는데요. 여행 6일차 즈음이었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좋긴 한데…나, 이제 좀 혼자 있고 싶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어도 너무 오래 붙어 있다 보면 잠시 떨어져 있고 싶은 순간, 모른다고 하지 않을거죠? 물론 이런 속마음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저는 일주일 동안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드는 드라마 <혼술남녀>를 틀어 놓고 매일 혼술하는 시간에 몰입했습니다. 열흘만에 마주한 혼술은 고독해서 소중했고, 오랜만이라 그 가치가 더욱 빛났습니다. 2016년도에 방영된 드라마에는 당시 혼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양면성이 담겨 있습니다. '어머, 저 사람 혼자 술 마시네, 같이 마실 사람이 없나봐',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과 오롯이 즐기는 나만의 힐링타임으로 여기는 시선으로요. 물론 저는 혼술을 처량맞다거나 외로운 행위로 보지 않고 그 고독의 가치를 잘 아는 등장인물들과 내적 친밀감을 형성했습니다. 혼술하는 여자, 나아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떠나며 과년한 여성이 아직 혼자여도 그게 뭐 어때서?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요즘 분위기가 (우리 할머니 제외) 저의 혼술력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드라마 속 각자의 이유로 혼술을 기울이는 이들 가운데 혼술을 가장 예찬하는 인물은 주인공 진정석(하석진, 애주가) 교수입니다. 노량진 공시학원에서 일타 강사인 그는 하루종일 떠드는 직업을 가진 자로서 굳이 떠들지 않아도 되는 혼술하는 시간이, 그 고독이 좋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데요. 그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클래식을 들으며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참치회 한접시를 두고 사케를 호록호록 마신다거나 지글지글 구운 대창이나 새우, 대게찜, 바삭한 치킨과 같은 각종 고퀄리티 안주에 거품이 제대로 올라 있는 맥주를 시원~하게 꿀꺽, 꿀꺽 들이키는, ‘밖혼술’파입니다. 맥주는 또 어찌 그렇게 맛있게 마시는지. 진심을 다해 목젖을 꿀렁거리며 맥주를 마셔 제치는 장면을 보면, 평소 배만 부르게 한다며 멀리했던 맥주가 당겨 일주일 동안 캔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몰라요.
저도 진 교수만큼이나 혼술을 좋아합니다. 제 직업은 하루종일 떠드는 일은 아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 결국 사람에게 지친 하루의 끝에 혼자 마시는 술 한잔에는 날카롭고 복잡하게 엉킨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고, 엉망이었던 하루도 잠시나마 희미하게 잊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죠. 저에게 혼술은 오늘 하루 노동에 대한 ‘보상주’이기도, 내일의 노동도 힘내라는 ‘응원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의 매일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알코올을 몸에 주입하며 마음을 충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주로 영업 종료 시간에 쫓길 필요 없는, 집에서요. 맞아요. 저는 하루종일 가슴을 조이던 브래지어를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잠깐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조차도 누가 보면 부끄러워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헐렁하게 늘어난 티셔츠에 펑퍼짐한 고무줄 바지로 갈아 입고는, 머리카락을 대충 돌돌 말아 올려 묶어 한 군데만 푹 꺼진 소파에 앉아 왼쪽 다리만 산 모양으로 세운채로 좋아하는 영상을 이것저것 돌려보며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마시는 혼술을 최고로 치는, ‘집혼술’파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 싱글 라이프의 8할은 ‘집혼술’이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 시간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결혼이나 동거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까지 생겼는데요. 왠지 챙겨야 할 가족은 더 늘어날 텐데, 혼술로 충전하는 나만의 시간은 확 줄어들(어 거의 사라질) 것만 같은 부당한(?) 앞날이 눈에 선하거든요. 그 대신 어떤 것을 얻게 될지, 저는 경험해본 적 없고 부딪혀본 적 없으니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고 당분간 벌어질 일도 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이 순간, 행복한 고독을 만끽하기로 합니다. 몇날 며칠 맥주로 빵빵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막판에는 맥주 대신 스페인산 뽀글이 한 병을 열었는데요. 가성비 철철 넘치는 까바(Cava)로 손꼽힌다는 페데리코 파테르니나 까바 브뤼(Federico Paternina Cava Brut)입니다. 자렐로(Xarel.lo), 마카베오(Macabeo), 빠레야다(Parellada) 세 가지 백포도 품종을 블랜딩한 스파클링 와인으로, 뽀글뽀글 입안 가득 기분 좋게 간지럽히는 기포가 맥주의 것보다 10배 정도는 왕성하게 움직입니다. 적당한 산미에 은은한 달콤함도 가지고 있고요. 은근 유치한 구석이 있는 드라마를 틀어 놓고 생각 없이 마시기에도 편안한데, 알코올 도수는 11.5%로 맥주보다 2~3배 높아 맥주보다 덜 마셔(덜 배불러)도 더 금방 취기가 오르는 것이 진짜로 가성비가 좋습니다. 제가 애정하는 혼술 안주인 감바스, 광어회와도 궁합이 정말 좋아 순식간에 절반을 비우고는 그날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홀딱 벗은 알몸으로 침대에 대자로 누워 열기를 식히고, 시원하게 소리내어 방귀도 좀 뀌며,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긴 머리카락을 보면서도 귀찮으니 내일 치우자고 생각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 그날 밤, 이게 혼자 사는 맛이지, 낄낄거리면서요. 만약 먼훗날 어찌저찌하여 혼술보다 누군가와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쁨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저는 역시 이토록 무질서해도 괜찮은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아쉬워할 것 같습니다.
2024.09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개봉ㅣ2016, 한국, tvN
출연ㅣ하석진(진정석), 박하선(박하나), 공명, 김기범
한줄평ㅣ나의 혼술 잠재력을 톡 건드린 드라마. 2016년 이후로 나는 프로 혼술러가 됐다
페데리코 파테르니나 까바 브뤼 (Federico Paternina Cava Brut)
산지ㅣ스페인, 까탈루냐
품종ㅣ자렐로(Xarel.lo), 마카베오(Macabeo), 빠레야다(Parellada)
도수ㅣ11.5%
특징ㅣ청사과, 귤, 라임, 강력한 기포
가격ㅣ1만원대
한줄평ㅣ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한모금 들이키면 큼직하고 풍성한 기포가 가득 올라오는, 여름날 소나기 같은 스파클링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