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야의 행복한 베이킹> X 도우 샤르도네
빵순이에게 왜 빵이 좋냐는 질문은 아마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래로 가장 부질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왜냐니요, 그냥 좋은 걸요. 길을 지나다가도 갓 구운 빵 냄새가 바람에 솔솔 실려 오면 콧구멍이 벌렁대고 누군가 서프라이즈로 선물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온 하루가 벅차오르는 저는 네, 꽤나 빵순이입니다. 한때는 밥보다 빵을 더 자주 먹던 시절이 있었고요. 거창한 빵지순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사 가는 곳마다 동네 빵집 사장님들이 늘 알아보던 단골 생활깨나 했습니다. 깜빠뉴와 치아바타 같은 식사빵의 신세계를 알았을 때는 정말 뒤통수를 ‘씨게'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고, 프랑스 파리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림 같던 디저트 가게들을 꼽겠습니다. 저도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기분이 퍽 상한 날에도 빵이라면 조금 마음이 느슨해지곤 합니다.
그러니 빵 맛이 나는 와인이라면 게임 끝일 밖에요. ‘도우 샤르도네(Dough Chardonnay)’ 이야기입니다. 첫 맛은 시트러스와 열대과일 향으로 상큼하다가 끝 맛은 빵에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 향이 싸악 맴돌더라고요. 오크 숙성을 한 화이트 와인에서는 흔히 버터과 토스트 향이 나긴 하지만, 이 와인은 ‘도우'라는 이름에 걸맞는 그 ‘빵내'가 유독 드라마틱하게 다가왔어요. 간혹 와인 맛을 표현할 때 ‘크리스피(Crispy)'하다고들 하는데, 바로 이 맛을 두고 하는 말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 고소한 피니시를 쉬이 놓아주지 않으려 몇 번이고 입을 쩝쩝대며 급히 부엌 선반을 뒤져 크래커를 곁들였죠. 그리고 뭐 보지, 곁들임 TV를 궁리하다 아주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그것도 빵을 골랐습니다.
그렇게 넷플릭스를 뒤져 <나디야의 행복한 베이킹>을 틀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디야라는 사람이 행복하게 베이킹하는 리얼리티 시리즈인데요. 영국 베이킹 경연 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그녀는 직접 재료를 구하러 교외에 가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그렇게 받은 영감을 베이킹으로 ‘행복하게’ 선보입니다. 영국 억양으로 ‘어-썸(Awesome)’과 ‘비우우우티풀(Beautiful)’, ‘앱쏠룻리(Absolutely)’ 등의 형용사와 부사를 남발하며 착착 만들어지는 디저트를 보고 있자면 뭐랄까요. 뭔가 포근하면서도 안락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못해 오밀조밀한 마음이 든달까요. 그렇게 빵 만드는 걸 보며 빵 맛이 나는 와인을 마셨습니다. 그 기분은 마치, 영국의 어느 시골 할머니 집 거실 소파에 앉아, 부엌 오븐에서 나는 파이 굽는 냄새를 맡으며 빈둥거리는, 뭐 그런 기분이랄까요(물론 신토불이 한국인입니다만). <감자의 행복한 오후>였습니다.
역시 사람은 자고로 좋아하는 걸 가까이 두고 살아야 행복한 법인가봐요. 흥에 겨워 쓰고 보니 이번 레터는 어째 빵순이 소개서로 시작해 빵 찬양서로 마무리되는 것 같지만, 행간마다 저의 진심어린 애정이 뿜어져 나오는 걸 조금이나마 느끼셨다면 목표 달성입니다. 일상에 정신없이 쪼이기만 하느라 정작 좋아하는 것들을, 행여 저처럼 여러분 또한 놓치고 계시다면 이렇게나마 꼭 상기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럴 땐 뭐든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고 가까이 곁에 두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더라, 그것이 먹는 거든 보는 거든 아무튼 그걸로 맘이 푸근해지는 순간 만큼은 ‘앱쏠룻리 비우우우티풀’하지 않아요? 하고요. 살면서 딱히 이유도 없이 좋은 게 있나요? 그렇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고소하게 떠올려보시면 좋겠습니다.
2024.10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개봉ㅣ2021, 영국
출연ㅣ나디야 후세인
장르ㅣ리얼리티 시리즈
한줄평ㅣ나디야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도우 샤르도네 2020 (Dough Chardonnay)
산지ㅣ미국, 캘리포니아
품종ㅣ샤르도네
도수ㅣ14%
특징ㅣ시트러스, 복숭아, 파인애플, 빵, 토스트, 버터
가격ㅣ3만원대 후반
한줄평ㅣ빵과 와인을 좋아한다면 백발백중 취저일 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