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X 쿠지노 마쿨 안티구랑스 리제르바 카베르네 소비뇽
세상 대다수의 일이 그러하듯, 결혼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우선 밝은 부분이라면 내 편이 생겼다는 안정감, 외롭지 않은 주말, 좀 속물적이긴 하지만 내 집 마련에 좀 더 가까워지겠다는 기대감도 꼽을 수 있을까요. 반면에 자유를 조금은 잃는다는 것, 챙겨야 할 날도 사람도 많아진다는 것, 싸워도 한 공간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 등을 어두운 부분으로 (여기선 이 정도로만) 꼽겠습니다. 다만 경험상(저는 기혼입니다) 이 모든 게 요시땅, 하며 동시에 밀려오기보다는 나름의 시간차를 두고 오고 간 것 같아요. 쓰고 보니 결혼이야말로 빛과 그림자를 아주 부산하게 넘나드는 행위인 듯합니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프랭크와 에이프릴 역시 첫 시작은 반짝였습니다. 예술가를 꿈꾸던 프랭크와 배우를 지망하는 에이프릴, 파티에서 만나 서로에게 반한 둘은 결혼 후 뉴욕 맨하탄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 지역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자리를 잡죠. 번듯한 직장을 가진 남편과 우아한 아내,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함께 꾸려가는 그럭저럭 살 만한 일상. 게다가 <타이타닉> 이후 다시 만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프랭크)와 케이트 윈슬렛(에이프릴)의 비주얼이 더해졌으니 화려한 샴페인, 적어도 발랄한 스타일의 샤도네이쯤이 어울리지 않을까, 처음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에 들어선 저는 진하디 진한 레드 와인이 절실해졌는데요. 예술은커녕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버린 프랭크, 무대는커녕 매일 육아와 가사에 지쳐가는 에이프릴. 한때 마음 속에 구름 같이 떠 있던 꿈이 모조리 사그라들고 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폭풍전야처럼 위태로워 보였으니까요. 칠레산 레드 와인을 오픈했습니다.
곧 비를 쏟아낼 것만 같던 먹구름은 불현듯 에이프릴의 제안에 그 무게를 조금 덜어냅니다. 모든 걸 버리고 다시 꿈을 찾아 프랑스 파리로 떠나자는 에이프릴. 처음엔 반색을 표하던 프랭크도 그녀의 설득에 98% 정도는 넘어갈 무렵, 저는 정말 진심으로 이들이 파리로 떠나길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먹구름이 어디 그리 쉽게 가시던가요. 떠나려는 이들의 발길을, 현실은 끈질기게 잡아 끌고 무너져가는 희망에 에이프릴은 절망합니다. 결말 스포는 삼가는 대신, 이 날 마신 와인 ‘쿠지노 마쿨 안티구랑스 리제르바 카베르네 소비뇽(Cousino Macul Antiguas Reserva Cabernet Sauvignon)’이 결말의 분위기와 꽤나 잘 부합했다는 점만 밝혀 둘게요. 농익은 베리향에 오크향이 꽤나 낭낭하게 존재감을 드러냈고, 탄닌은 의외로 약했습니다. 여기에 살짝의 허브향이 조금은 이질적으로, 그러나 긴 여운으로 남았고요. 진한 자줏빛깔에 처음부터 끝까지 풀바디에 가깝도록 묵직했습니다.
두 사람의 파리행을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에서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저 또한 가슴 한켠에 늘 꿈을 안고 사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리 나쁘지 않은 일상을 살고는 있지만, 속에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갈구하고 미처 하지 못한 걸 후회하며, 그럼에도 언젠가 꿈을 이룬 저의 모습을 공상하고, 로또도 곧잘 사고요. 물론 현실은 분노 유발 회사에 다가오는 대출이며 카드값이며, 로또는 5천원도 한 번 되지 않는 언럭키 비키지만요. 그럼에도 결혼이 내 발목을 잡는다거나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극단적으로 몰아가지는 않으리라,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착 가라앉은 공기를 제 식으로 훌훌 휘저어봅니다. 그러기엔 둘이 함께 뒹굴거리는 주말의 나른함, 아플 때 최대치로 걱정하는 내 편, 맛있는 걸 같이 맛있어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결혼이 선사한 ‘빛'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하니까요. 그리고 뭐, 유부녀라고 뭐 되지 말란 법 없잖아요? 혹시 아나요. ‘원스 어폰 어 와인’이 무럭무럭 커서 어디선가 베스트셀러가 될지, 그래서 여니고니님과 나란히 <유퀴즈>에라도 출연하게 될지. 자, 또 이렇게 저는 구름 위를 걸을 테니 지상에 계신 독자 여러분은 응원해주시겠어요? 환하게, 부디.
2024.09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개봉ㅣ2009, 미국/영국
감독ㅣ샘 멘데스
출연ㅣ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프랭크), 케이트 윈슬렛(에이프릴)
한줄평ㅣ결혼을 앞둔 이상주의자가 한 번쯤은 곱씹어봐야 할 영화
쿠지노 마쿨 안티구아스 리제르바 까베르네 소비뇽 (Cousino Macul Antiguas Reserva Cabernet Sauvignon)
산지ㅣ칠레 마이포 밸리
품종ㅣ카베르네 소비뇽
도수ㅣ14%
특징ㅣ익은 베리류, 자두, 약간의 허브, 낭낭한 오크향, 풀바디, 부드러운 탄닌
가격ㅣ이마트24에서 세일가로 2만원대 후반
한줄평ㅣ다음번엔 삼겹살이나 양고기와 함께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