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라이닝 플레이북> X 보네 루즈 가메 누아
울적할 땐 단 걸 먹고, 답답할 땐 매운 걸 먹듯 저에게는 감정에 따라 찾는 영화 리스트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심신이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리틀 포레스트>, 모르겠고 훌쩍 떠나고 싶은 날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같은. 그리고 짜증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를 때면 이 영화가 당기곤 하는데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입니다. 시원하게 깨부수는 액션도 아니고 야들야들한 힐링 류는 더더욱 아니고, 뭐랄까요. 그냥 제대로 미쳐버린 사람들의 대환장 파티라고나 할까요. 누구 하나 정상이 없어 보이는 요상한 스토리에 이상하게, 나름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건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저는 이날 이 영화가 고팠던 걸 보면 적잖이 짜증이 차올랐었나 봅니다.
배고파서, 엄마의 잔소리에, 상사의 채근에도 곧잘 기분이 상하는 민감러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저의 최고봉 짜증벨은 늘 나 자신입니다. ‘왜 그것밖에 안 돼?’ ‘왜 제대로 말을 못해?’ ‘뭐 이렇게 우유부단한 거야?’ 내 맘에 도무지 들지 않는 나 자신만큼 좌절스럽고 화가 날 때는 없으니까요. 여기저기 쓸 데 없이 남 눈치 보느라 내 맘대로 뭐 하나 하지 못한 날. 그래서 저는 이날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보게 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저에게 ‘통쾌 상쾌’니까요. 아내의 외도남을 폭행한 후 정신 병원에 갔다가 일상으로 돌아온 팻(브래들리 쿠퍼)과 남편의 죽음 이후 상실감에 온 직장 동료들과 관계를 맺다 쫓겨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스포츠 경기 내기에 전 재산을 거는 팻의 아빠(로버트 드 니로)까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대책 없이 날뛰는 일상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남의 시선 따위 동네 개나 줘버리란 듯 할 말 다 하며 독특하다 못해 괴상한(본인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일지도 모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의 행보가 시작되자 역시나 보길 잘했다, 살짝쿵 (음흉하게) 웃음 지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이 상당한 인기를 끈 걸 보면 이런 감정, 저만 느끼는 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그죠?).
영화만큼이나 저의 짜증을 확실히 잠재울 수 있는 것 하나 더, 여기에 와인이 빠질 순 없죠. 필터링 없이 쌩쌩 오가는 팻과 티파니의 '날'대화에 이런 와인이면 좋겠다, 싶었는데요. 너무 호락호락하고 둥글기만 한 것보다는 어딘가 튀는 구간이 있을 것, 누구나 다 아는 주류보다는 약간은 마이너한 그런. 그래서 저의 선택은? '가메(Gamay)'입니다. 피노누아와 비슷하게 바디감이 여리하지만 제 입맛에 피노누아보다는 조금은 더 거칠고 산도가 뾰족하면서도 간혹 쿰쿰하고 스파이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피노누아보다는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 또한 흡족합니다. 피노누아보다는 대체로 가격대가 저렴한 탓(보다는 덕)에 혹자는 ‘가난한 자를 위한 피노누아'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또한 이 영화에 좀 찰떡이고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약간의 꽃 향기를 풍기기도, 산도가 누그러지면서 요거트처럼 실키한 텍스처를 내기도 하는데, 정말이지 비싼 와인만이 맛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좀 풀렸냐고요? 네, 다행히도요. 난데없이 댄스 대회를 함께 나가자는 티파니의 제안에 어물쩡 넘어간 팻, 그리고 꽤 열정적인 연습 끝에 결국 댄스 대회에 나가게 된 둘. 끝까지 진부하지 않은 흐름에 어느새 아스팔트 같던 저의 마음이 마시던 가메처럼 실키해졌습니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랑 와인이 있잖아. 짜증 지뢰가 콕콕 박힌 하루에도 이렇게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내일은 온화하리, 다짐해봅니다. 그래, 그 사람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요. 아, 근데 저는 대체 왜 그때 바보처럼 한 마디 못한 걸까요? 하아, 2차 갑니다.
2024.10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Silver Linings Playbook)
개봉ㅣ2013, 미국
감독ㅣ데이비드 O. 러셀
출연ㅣ브래들리 쿠퍼(팻), 제니퍼 로렌스(티파니), 로버트 드 니로(솔리타노)
한줄평ㅣ세상에는 참 다양한 미침(crazy)이 존재한다는 안도감. 근데 제니퍼 로렌스는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보네 루즈 가메 누아 (Bonnet Rouge Gamay Noir)
산지ㅣ프랑스, 부르고뉴 보졸레
품종ㅣ가메
도수ㅣ13%
특징ㅣ딸기, 체리 등의 베리류, 높은 산도, 여리한 바디, 약간은 쿰쿰한 스파이시, 그리고 미네랄
가격ㅣ2만원대
한줄평ㅣ피노누아의 하위 호환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훌륭한 텍스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