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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난 집에 선풍기 쐬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X 보네 루즈 가메 누아

by gamja


울적할 땐 단 걸 먹고, 답답할 땐 매운 걸 먹듯 저에게는 감정에 따라 찾는 영화 리스트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심신이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리틀 포레스트>, 모르겠고 훌쩍 떠나고 싶은 날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같은. 그리고 짜증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를 때면 이 영화가 당기곤 하는데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입니다. 시원하게 깨부수는 액션도 아니고 야들야들한 힐링 류는 더더욱 아니고, 뭐랄까요. 그냥 제대로 미쳐버린 사람들의 대환장 파티라고나 할까요. 누구 하나 정상이 없어 보이는 요상한 스토리에 이상하게, 나름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건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저는 이날 이 영화가 고팠던 걸 보면 적잖이 짜증이 차올랐었나 봅니다.


110332_2449973_1729580476973398768.png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틸컷. 누가 더 요상하게?


배고파서, 엄마의 잔소리에, 상사의 채근에도 곧잘 기분이 상하는 민감러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저의 최고봉 짜증벨은 늘 나 자신입니다. ‘왜 그것밖에 안 돼?’ ‘왜 제대로 말을 못해?’ ‘뭐 이렇게 우유부단한 거야?’ 내 맘에 도무지 들지 않는 나 자신만큼 좌절스럽고 화가 날 때는 없으니까요. 여기저기 쓸 데 없이 남 눈치 보느라 내 맘대로 뭐 하나 하지 못한 날. 그래서 저는 이날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보게 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저에게 ‘통쾌 상쾌’니까요. 아내의 외도남을 폭행한 후 정신 병원에 갔다가 일상으로 돌아온 팻(브래들리 쿠퍼)과 남편의 죽음 이후 상실감에 온 직장 동료들과 관계를 맺다 쫓겨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스포츠 경기 내기에 전 재산을 거는 팻의 아빠(로버트 드 니로)까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대책 없이 날뛰는 일상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남의 시선 따위 동네 개나 줘버리란 듯 할 말 다 하며 독특하다 못해 괴상한(본인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일지도 모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의 행보가 시작되자 역시나 보길 잘했다, 살짝쿵 (음흉하게) 웃음 지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이 상당한 인기를 끈 걸 보면 이런 감정, 저만 느끼는 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그죠?).


110332_2449973_1729580504698857503.png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스틸컷. 삶이 미쳐돌아가도 춤은 춰


영화만큼이나 저의 짜증을 확실히 잠재울 수 있는 것 하나 더, 여기에 와인이 빠질 순 없죠. 필터링 없이 쌩쌩 오가는 팻과 티파니의 '날'대화에 이런 와인이면 좋겠다, 싶었는데요. 너무 호락호락하고 둥글기만 한 것보다는 어딘가 튀는 구간이 있을 것, 누구나 다 아는 주류보다는 약간은 마이너한 그런. 그래서 저의 선택은? '가메(Gamay)'입니다. 피노누아와 비슷하게 바디감이 여리하지만 제 입맛에 피노누아보다는 조금은 더 거칠고 산도가 뾰족하면서도 간혹 쿰쿰하고 스파이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피노누아보다는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 또한 흡족합니다. 피노누아보다는 대체로 가격대가 저렴한 탓(보다는 덕)에 혹자는 ‘가난한 자를 위한 피노누아'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또한 이 영화에 좀 찰떡이고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약간의 꽃 향기를 풍기기도, 산도가 누그러지면서 요거트처럼 실키한 텍스처를 내기도 하는데, 정말이지 비싼 와인만이 맛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좀 풀렸냐고요? 네, 다행히도요. 난데없이 댄스 대회를 함께 나가자는 티파니의 제안에 어물쩡 넘어간 팻, 그리고 꽤 열정적인 연습 끝에 결국 댄스 대회에 나가게 된 둘. 끝까지 진부하지 않은 흐름에 어느새 아스팔트 같던 저의 마음이 마시던 가메처럼 실키해졌습니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랑 와인이 있잖아. 짜증 지뢰가 콕콕 박힌 하루에도 이렇게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내일은 온화하리, 다짐해봅니다. 그래, 그 사람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요. 아, 근데 저는 대체 왜 그때 바보처럼 한 마디 못한 걸까요? 하아, 2차 갑니다.



2024.10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110332_2449973_1729580308914542998.png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Silver Linings Playbook)

개봉ㅣ2013, 미국

감독ㅣ데이비드 O. 러셀

출연ㅣ브래들리 쿠퍼(팻), 제니퍼 로렌스(티파니), 로버트 드 니로(솔리타노)

한줄평ㅣ세상에는 참 다양한 미침(crazy)이 존재한다는 안도감. 근데 제니퍼 로렌스는 왜 이렇게 예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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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네 루즈 가메 누아 (Bonnet Rouge Gamay Noir)

산지ㅣ프랑스, 부르고뉴 보졸레

품종ㅣ가메

도수ㅣ13%

특징ㅣ딸기, 체리 등의 베리류, 높은 산도, 여리한 바디, 약간은 쿰쿰한 스파이시, 그리고 미네랄

가격ㅣ2만원대

한줄평ㅣ피노누아의 하위 호환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훌륭한 텍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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