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 X 칸티나 콜리 에우가네이 메를로
낙첨. 올해만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저는 집값의 앞자리가 다른 서울에서의 내 집 마련은 포기한지 오래고 출퇴근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이제는 감례할 수 있다며 고양, 파주 경기 북부와 부천, 수원 등 중남부는 물론 연고가 아예 없는 인천까지 반경을 넓혀 몇 년째 주택 청약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하, 이거 정말 쉽지 않네요.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분양가로 나온 집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이고, 그래서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올해 나온 무순위 추첨의 동탄역 롯데캐슬=‘로또캐슬’ 청약에는 294만명이 몰렸다죠. 저도 그중 한명이었습니다만) 저는 정말 로또를 사는 마음처럼 큰 기대를 하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희망을 안고 당첨자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하루하루 노동할 힘을 얻곤 합니다. 그래서 낙첨의 결과를 받으면 ‘그래, 거긴 회사랑 너무 멀었어’라든가 ‘거긴 좀 작지’, ‘어차피 나에겐 무리였어’라고 자위하면서도 그날 하루는 영 풀이 죽습니다. 정말로 제가 오갈 데 없는 홈리스(Homeless)도 아닌데 말이죠.
4,978명과의 경쟁에서 진 날은 영혼 없는 위로 대신 집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집에 살고 싶은가, 나는 왜 집을 사고 싶은가, 나는 집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가.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를 꺼냈습니다. 2011년, 암에 걸린 남편을 보내고 혼자가 된 주인공 펀(Fern)에게 남은 것은 낡은 밴 한 대뿐입니다. 경제 붕괴로 도시 전체가 몰락한 네바다주 엠파이어에서는 일할 의지가 있어도 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고요. 펀은 밴을 타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법니다. 물론 그가 어딘가에 정착할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살던 동네의 이웃, 펀의 언니, 펀과 다정한 마음을 나누었던 데이브는 그의 불안정한 거주를 걱정하며 함께 살자,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펀은 길 위를 유랑하며 사는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합니다. 펀은 거주할 곳이 없는 것(Houseless)이지, 집이 없는 게(Homeless) 아니었거든요.
영화는 펀처럼 유랑하는 삶을 선택한 노매드들의 다양한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겨우 1~2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서 혼자서도 복닥복닥, 겨울이면 추위와, 여름이면 더위와 사투를 벌이며 생존하는 삶이지만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이들에게서 저는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 용기를 느낍니다. 그런 면에서 이날 제가 선택한 와인도 평소의 결과는 조금 다른데요. 이탈리아에서 온 칸티나 콜리 에우가네이 메를로(Cantina Colli Euganei Merlot)입니다. 이탈리아 와이너리들은 이탈리아 토착 품종으로 와인을 만드는 경우가 많고, 대체로 토착 품종에서 최대의 맛을 뽑아내는 편입니다. 프랑스에 뿌리를 둔 메를로는 국제 품종이 될 만큼 어디서든 잘 자라는 편이지만 이탈리아 와이너리들은 주로 이탈리아 토착 품종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탈리아에서 온 메를로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죠. 그게 평범한 분위기인 이탈리아에서 메를로를 선택한 이 와인 메이커, 나는 나의 길을 걷겠소, 라고 말하는 것 같아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와인은 오픈 초기 쨍한 스파이시, 후추, 베리류의 향이 제각각 조금 튀긴해도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 메를로만의 안정감, 부드러운 텍스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친 땅 위에서의 잠자리에 완벽 적응한 주인공 펀처럼요. 너무 과하지도, 너무 부족한 것도 없는 와인은 많은 걸 쥐고 살지 않아 오히려 행복한 노매드들을 보며 편안하게 마시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고요.
그러고 보면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삶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어릴 땐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야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도 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또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아이도 키우며 그 와중에 노후 대책까지, 해야 된다는 게 너무나 많잖아요? 애초에 평범한 삶이라는 원 안에 노매드가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그러니 내 집 마련에 대한 꿈은 그냥 남들이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살아야할 것만 같아서, 사실은 거주의 목적보다 투자에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넓은 마당, 적어도 테라스가 있거나 숲이 보이는 집에 살고 싶고, 또 이곳저곳 거주지를 옮겨 새로운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동(不動)’으로 돈과 발이 묶일 수밖에 없는 아파트 청약에 전전긍긍하는 저는 정말 모순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저는 또 부동산 앱을 자주 기웃거리고 청약 경쟁에 뛰어들겠죠? 지금 당장 30년 동안 매달 상환해야 할 대출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홀가분한데 말이에요. 여전히 남아 있는 물음표에 대한 답은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 찾을 수 있긴 한 건지, 영화를 다 보고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나도 물음표가 난무하는, 평범한 삶을 좇는 사람의 고달픈 하루입니다.
2024.10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개봉ㅣ2021, 미국
감독 | 클로이 자오
출연ㅣ프란시스 맥도맨드(펀), 데이빗 스트라탄(데이브)
장르ㅣ드라마
한줄평ㅣ어떻게 살고 싶은가,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영화
칸티나 콜리 에우가네이 메를로(Cantina Colli Euganei Merlot)
산지ㅣ이탈리아, 콜리 에우가네이
품종ㅣ메를로
도수ㅣ12.5%
특징ㅣ블랙 베리, 체리, 후추, 스파이시, 담요처럼 보드라운 텍스쳐
가격ㅣ3만원대
한줄평 | 단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았던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