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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알록달록한 낙엽이 지는 계절엔

<만추> X 기센 더 브라더스 말보로 피노 누아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노 누아 같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처음에는 피노 누아의 부드러우면서 섬세하고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면을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이라 태어날 때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곱게 자라는 것도 부러운데, 와인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영롱한 루비빛의 겉모습도 아름다웠고요.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탄탄한 구조감에서는 자신만의 중심을 갖고 살아가는 현명한 사람의 기운도 느껴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합적인 향과 맛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탓에 결국 긴 여운으로 남는 신비로운 마지막 모습까지도. 지금도 저는 피노 누아의 이런 면모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온갖 고급스러운 수식어를 가진 피노 누아는 의외로 (숙성이 오래 될수록) 쿰쿰한 부엽토 냄새를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걸 두고 (빈틈은 아니지만 의외의 구수한 모습에) 인간미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영화 <만추> 스틸컷. 축축한 시애틀 거리


그래서인지 피노 누아는 가을에 가장 당기는 와인입니다. 알록달록한 낙엽이 진 땅 위로 비가 내리고 난 후, 스멀스멀 올라오는 습기 가득한 숲속의 낙엽 썩은 흙냄새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여름내 푸릇하고 청량한 화이트와인만 달고 살다가 축축한 낙엽 냄새의 피노 누아가 생각나는 날이면, 아 비로소 가을이 왔구나, 바뀐 계절을 실감합니다. 낙엽이 진다는 건 곧 겨울이 온다는 의미잖아요? 한 해의 끝을 목전에 두고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어 초조한 마음마저 다 품어줄 것 같은 포용력도, 가을에 피노 누아를 찾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그냥 피노 누아가 마시고 싶었던 저는 가을 냄새를 따라 '기센 더 브라더스 말보로 피노 누아(Giesen The Brothers Marlborough Pinot Noir)'를 오픈하고 '늦을 만(晩), 가을 추(秋)'의 이름마저 가을스러운 영화 <만추>를 꺼냈습니다. 


영화 <만추> 스틸컷. 여기서 스파클링 와인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가 궁금하다


스토리는 살인죄로 7년째 수감 중인 애나(탕웨이)가 특별 휴가를 나와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서 만난 훈(현빈)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겪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한 피노 누아 와인 역시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존재감을 발휘했는데요. 영화 초반부, 와인은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보석금을 내고 3일 동안 잠시 밖을 나온 애나의 차갑고 어두운 얼굴처럼 옅은 타닌과 정향, 후추와 같은 날카롭고 떫은 맛이 감돌았는데, 그런 애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훈의 플러팅처럼 은은하고 발랄한 베리향도 함께 머금고 있었습니다. 비가 자주 내리고 흐린 날들이 많은 가을의 시애틀 거리는 피노 누아의 젖은 낙엽 냄새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다했고요. 타닌과 스파이시한 향이 날아가고 드디어 피노 누아다운 우아한 텍스처에 도달할 때 쯤, 시애틀의 하늘에는 안개가 걷히고, 애나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아주 옅은 미소가 번집니다. 물론 애나에게 주어진 3일이라는 시간은 금세 흘러갔고 제 와인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관객에게 긴 여운을 남긴 영화의 열린 결말마저 피노 누아를 닮은 영화에서, 저는 또 한번 취향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가을은 어느새 찾아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찰나 같은 계절이라는 걸 당분간 자주, 종종 의식적으로 상기하겠다고요. 앞으로도 피노 누아 같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만추가 지나가기 전까지 애정하는 피노 누아를 좀 더 마셔보겠다는 함의, 눈치채셨죠?



2024.10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만추 (Late Autumn)

개봉ㅣ2011, 미국/대한민국

감독ㅣ김태용

출연ㅣ현빈(훈), 탕웨이(애나)

한줄평ㅣ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 속 우아한 피노 누아 같았던 탕웨이의 미모가 빛난 영화 


기센 더 브라더스 말보로 피노 누아 (Giesen The Brothers Marlborough Pinot Noir)

산지ㅣ뉴질랜드, 말보로 

품종ㅣ피노 누아

도수ㅣ14%

특징ㅣ은은한 베리향, 코끝을 찌르는 스파이시, 옅은 타닌, 문득문득 퍼지는 부엽토 냄새

가격ㅣ4만원대

한줄평ㅣ말보로는 피노 누아마저 완벽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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