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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함께할 때 피는 꽃

<밤에 우리 영혼은> X 부티노 라 플뢰르 솔리테르 코트 드 론 블랑


지난 주말 남편에게 대뜸 물었습니다. “나이 들어 만약 혼자가 되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돼?” 은퇴 후 더 이상 출근할 일도 없이, 게다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면 어떻게 하냐고. 인생은 짧아지는데 하루는 길어지는 상황, 그 지루함을 대체 뭘로 타파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 걸 뭐 벌써부터 걱정하냐며 남편은 무심하게 넘겼지만 이미 부정 회로를 돌린 이 구역 걱정 대마왕(저)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습니다. 상상하기조차 싫지만, 행여나 노년에 혼자 맞이할 이 긴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가늠이 잘 가지 않으니까요.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스틸컷. 영혼을 달래는 사이


그래서 이웃집 남자에게 “우리 밤에 함께 잘래요?”라던 그녀의 도발에, 저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습니다(남편, 혹시 보고 있다면 내가 그러겠다는 건 아니야). 외간 남자에게 함께 밤을 보내자는 이 파격적인 발상의 주인공은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에 등장하는 70대 여성 애디인데요. 남편과의 사별 후 오랫동안 외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는 같은 처지의 이웃, 루이스에게 밤을 함께 보내보자고 제안하죠. 뭘(?) 하자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같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자는 의미에서요. 처음엔 망설였던 루이스는 결국 제안에 수락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기 시작해요. 그렇게 무료한 일상에 서서히 생기가 싹트며 둘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쌓아갑니다. 누군가는 ‘노년의 로맨스’라는 표현으로 이 영화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루이스와 애디는 단순한 남녀 관계를 넘어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보듬는 친구이자 가족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풋풋한 청춘물에선 찾아볼 수 없는 깊은 배려심과 편안함이 영화 전반에 카페트처럼 깔려 있습니다. 

    

그런 영화의 무드상, 저는 이날 잔잔한 블렌딩 와인을 준비했는데요. 서로의 허기를 채워가는 루이스와 애디의 관계가 꼭 여러 품종이 서로 보완하여 완성되는 블렌딩 와인 같았거든요. 때마침 냉장고에 있던 프랑스 론 지방의 ‘부티노 라 플뢰르 솔리테르 코트 드 론 블랑 2022(Boutinot La Fleur Solitaire Cotes du Rhone Blanc)'이 소환됐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선에 걸맞는 차분함과 섬세함, 어느 하나 튀지 않고 동글한 캐릭터. 서로 부족한 점은 채우고 모난 점은 상쇄해 결국에 좋은 방향으로 향하는 블렌딩의 목적에 매우 충실한 와인입니다. 산도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절제된 남부 론 스타일의 와인은 마치 애디와 루이스처럼, 요란한 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은하게 잔향을 풍겼어요. 라벨에 포함된 ‘Fleur(프랑스어로 꽃)’이라는 표현 그대로, 잔을 비우는 내내 꽃내음이 고고하게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다시 남편과의 대화로 돌아가, 여전히 저는 ‘만약 혼자가 되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난제에 대한 또렷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애디처럼 옆집 남자한테 파격 제안을 할 깜냥이 되지도 않을 것 같고요. 결국엔 ‘있을 때 잘하자' 정도의 상투적이지만 건설적인 결론으로 대화를 일단락했죠. 새해도 아닌데 대뜸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덕담을 남편에게 건네기도 했고요(남편둥절). 근데 건강 운운한지 1분도 안 되어 (몰랐는데) 다이어트 중인 남편을 꼬셔서는 배달 앱을 켜는 저, 그래도 여러분은 이해해주실 거죠? 치킨이 먹고 싶고, 주말이고, 마시다 만 와인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일 때 우리는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으니까요.




2024.08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Our Souls at Night)

개봉ㅣ2017, 미국, 넷플릭스

감독ㅣ리테스 바트라

출연ㅣ로버트 레드퍼드(루이스), 제인 폰다(애디)

한줄평ㅣ청춘물엔 없는 단단함과 깊이감, 멀지만 멀지만은 않은 노년의 감정들


부티노 라 플뢰르 솔리테르 코트 드 론 블랑 2022 (Boutinot La Fleur Solitaire Cotes du Rhone Blanc)

산지ㅣ프랑스 론

품종ㅣ그르나슈 블랑, 비오니에, 루산느 등 

도수ㅣ13%

특징ㅣ흰 꽃, 자몽의 쓴 맛이 두드러지는 시트러스, 허브, 꿀, 절제된 산도

가격ㅣ4만원대

한줄평ㅣ수수한 안개꽃 같은 와인. 약간의 쓴 맛이 있어 의외로 달달구리와 잘 어울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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