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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우리의 빛나던 조각들은

<보이후드> X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


아이가 자라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습니다. 영화 <보이후드>를 보는 저의 마음이요. 성장기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지만, 이 영화는 스케일 면에서 ‘어나더 레벨’입니다. 무려 12년 동안 같은 감독과 배우가 매년 만나 조금씩 촬영하며 그야말로 생생한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냈죠. <보이후드>는 <비포 선라이즈>로 시작하는 일명 ‘비포 시리즈’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맘먹고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인데요. 영화가 시작할 땐 어린 아이였던 주인공이 영화가 끝날 때쯤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으니, 정말로 한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오롯이 관찰하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대’서사에 그래서 어떤 와인을 곁들이면 좋을지, 나름의 고민이 많았어요. 우선은 너무 가벼운 바디는 아웃. 탄닌 없이 매끈하기만 한 텍스처도 녹록치 않은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죠. 조금은 거친 면도 있지만 결국엔 조화롭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레드 와인, 고심 끝에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을 골랐습니다. 믿고 보는 감독과 믿고 마시는 와인의 조합입니다.


영화 <보이후드> 스틸컷. 아이와 어른, 모두 성장하는 과정


막 오픈한 파워풀 레드 와인의 기세처럼, 메이슨과 사만다 남매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걸걸합니다. 엄마의 재혼으로 함께 살게 된 새 아빠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죠. 이에 엄마 올리비아는 그와 이혼 후 새로운 남자와 또 한 번의 재혼을 하지만 그 또한 알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메이슨과 사만다는 엄마를 따라 도망치다시피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듯 쉽지 않은 일상에서도 다행히 남매의 모든 나날이 불행하지만은 않아요.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아빠와의 대화는 맘 맞는 찐친과의 수다처럼 소소하지만 유쾌하고, 취향껏 꿈을 키워나가는 과정에 설레기도 하고요. 어두운 기억, 그럼에도 이따금 빛나는 순간들에 기대어 메이슨과 사만다는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해갑니다.


장장 2시간이 넘어가는 러닝 타임이건만, 한 사람의 삶을 진공 포장하듯 압축해 눌러놓은 것 같은 장면 장면에 시간도 와인도 우습게 동나고 말았습니다. 어엿한 대학생이 된 메이슨을 보니 이렇게 잘 자라준 게 얼마나 대견한지, 이모의 가슴은 한껏 웅장해졌죠. 좀 거칠고 스모키한 면이 있으면서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듯 마치 짜여진 퍼즐처럼 탄닌, 산도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카베르네 소비뇽과의 페어링도 성공적이고요. 벅찬 가슴과 취기에 부풀어오른 F력으로 이제는 까마득해져버린 나의 어린 시절도 한 번 되새겨봅니다. 사소하지만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은, 울적한 시기도 무사히 날 수 있게 했던 작지만 단단한 나의 조각들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 차곡차곡 모아둔 이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로 지금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좋은 영화와 좋은 와인은 아주 살짝 거들 뿐이고요.



2024.08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이미지 출처ㅣ핀터레스트

보이후드 (Boyhood)

개봉ㅣ2014, 미국

감독ㅣ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ㅣ엘라 콜트레인(메이슨), 에단 호크(아빠), 패트리샤 아퀘트(엄마), 로렐라이 링클레이터(사만다)

한줄평ㅣ잘 자라줘서 고마워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 2020 (Textbook Cabernet Sauvignon)

산지ㅣ미국 나파밸리

품종ㅣ카베르네 소비뇽

도수ㅣ13.8%

특징ㅣ베리류, 바닐라, 초콜릿, 버터, 스모키, 풀바디, 중간 탄닌, 중간 산도

가격ㅣ6만원대

한줄평ㅣ믿고 마시는 나파밸리 레드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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