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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빛나던 조각들은

<보이후드> X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

by gamja


아이가 자라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습니다. 영화 <보이후드>를 보는 저의 마음이요. 성장기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지만, 이 영화는 스케일 면에서 ‘어나더 레벨’입니다. 무려 12년 동안 같은 감독과 배우가 매년 만나 조금씩 촬영하며 그야말로 생생한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냈죠. <보이후드>는 <비포 선라이즈>로 시작하는 일명 ‘비포 시리즈’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맘먹고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인데요. 영화가 시작할 땐 어린 아이였던 주인공이 영화가 끝날 때쯤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으니, 정말로 한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오롯이 관찰하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대’서사에 그래서 어떤 와인을 곁들이면 좋을지, 나름의 고민이 많았어요. 우선은 너무 가벼운 바디는 아웃. 탄닌 없이 매끈하기만 한 텍스처도 녹록치 않은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죠. 조금은 거친 면도 있지만 결국엔 조화롭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레드 와인, 고심 끝에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을 골랐습니다. 믿고 보는 감독과 믿고 마시는 와인의 조합입니다.


110332_2318465_1722923176457786826.png 영화 <보이후드> 스틸컷. 아이와 어른, 모두 성장하는 과정


막 오픈한 파워풀 레드 와인의 기세처럼, 메이슨과 사만다 남매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걸걸합니다. 엄마의 재혼으로 함께 살게 된 새 아빠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죠. 이에 엄마 올리비아는 그와 이혼 후 새로운 남자와 또 한 번의 재혼을 하지만 그 또한 알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메이슨과 사만다는 엄마를 따라 도망치다시피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듯 쉽지 않은 일상에서도 다행히 남매의 모든 나날이 불행하지만은 않아요.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아빠와의 대화는 맘 맞는 찐친과의 수다처럼 소소하지만 유쾌하고, 취향껏 꿈을 키워나가는 과정에 설레기도 하고요. 어두운 기억, 그럼에도 이따금 빛나는 순간들에 기대어 메이슨과 사만다는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해갑니다.


장장 2시간이 넘어가는 러닝 타임이건만, 한 사람의 삶을 진공 포장하듯 압축해 눌러놓은 것 같은 장면 장면에 시간도 와인도 우습게 동나고 말았습니다. 어엿한 대학생이 된 메이슨을 보니 이렇게 잘 자라준 게 얼마나 대견한지, 이모의 가슴은 한껏 웅장해졌죠. 좀 거칠고 스모키한 면이 있으면서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듯 마치 짜여진 퍼즐처럼 탄닌, 산도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카베르네 소비뇽과의 페어링도 성공적이고요. 벅찬 가슴과 취기에 부풀어오른 F력으로 이제는 까마득해져버린 나의 어린 시절도 한 번 되새겨봅니다. 사소하지만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은, 울적한 시기도 무사히 날 수 있게 했던 작지만 단단한 나의 조각들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 차곡차곡 모아둔 이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로 지금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좋은 영화와 좋은 와인은 아주 살짝 거들 뿐이고요.



2024.08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110332_2318465_1722923173685943279.png 이미지 출처ㅣ핀터레스트

보이후드 (Boyhood)

개봉ㅣ2014, 미국

감독ㅣ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ㅣ엘라 콜트레인(메이슨), 에단 호크(아빠), 패트리샤 아퀘트(엄마), 로렐라이 링클레이터(사만다)

한줄평ㅣ잘 자라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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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 2020 (Textbook Cabernet Sauvignon)

산지ㅣ미국 나파밸리

품종ㅣ카베르네 소비뇽

도수ㅣ13.8%

특징ㅣ베리류, 바닐라, 초콜릿, 버터, 스모키, 풀바디, 중간 탄닌, 중간 산도

가격ㅣ6만원대

한줄평ㅣ믿고 마시는 나파밸리 레드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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