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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포트 와인의 여름나기

<첨밀밀> X 칵번 타우니 포트 와인


원래 계획은 이랬습니다. 분홍빛 로제 와인 한 병을 열고, 홍콩식 완탕면 한 그릇과 군만두 한 접시를 집으로 주문합니다. 로제 와인은 밀가루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과 조합이 좋습니다. 곧 따뜻한 국수와 만두가 도착할 건데, 여기에 찜해둔 영화는 <첨밀밀>입니다. <첨밀밀>은 주인공 이요(장만옥)와 소군(여명)을 비롯한 남녀 간의 다양한 사랑에 1980~1990년대 ‘기회의 땅’ 홍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틈틈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홍콩스러운 홍콩이 가득 담긴 영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분명 홍콩행 항공권을 뒤적이게 될 게 뻔했고, 지름신을 막기 위해 생각해낸 궁여지책이 국수와 만두입니다. 냉장고에 맥주 대신 탄산수를 미리 채워넣는 것과 같은 격이죠.


영화 <첨밀밀>스틸컷. 홍콩이 한가득 담긴 장면


하지만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입니다. 그날따라 로제 와인 대신 지난 겨울 선물 받은 칵번 타우니 포트 와인(Cockburn’s Tawny Port Wine)이 눈에 밟히더군요. 포트 와인은 달콤하지만 도수가 높고 끈적한 텍스쳐를 가지고 있어 저는 가을과 겨울 즈음, 하루의 마무리 와인으로 한 잔씩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후에 마시면 몸에 열기가 확 돌거든요. 그런데 감기를 달고 지냈던 겨우내 강제 금주령에 처해지며 포트 와인의 계절을 놓치게 된 거예요. 그 사이 계절은 두 번이 바뀌었고, 이토록 덥고 끈적해졌습니다. 근데요, 늦으면 좀 어때요. 아이스와인도 예상치 못한 이른 추위에 얼어버린 포도로 우연히 얻게 된 보물 같은 와인입니다. 저는 더 늦기 전에 노선을 바꿔 (어쩌면 이미 상했을지도 모를) 포트 와인을 과감하게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마실 자신은 없어 수박과 복숭아, 오렌지까지 여름맛 과일을 가득 담아 샹그리아를 만들었습니다. 와인은 다행히 건강했고요. 포트 와인이 가진 바닐라, 무화과, 건포도와 같은 진득한 과일 맛에 산뜻하고 수분 가득한 여름 과일이 만나 파티를 열었습니다. 여기에 얼음을 동동 띄워 도수를 살짝 낮추니 여름에도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달콤한 포트 와인이 되더군요. 찬물로 샤워하고 마시는 ‘얼음 동동 샹그리아’ 한 잔은 약주입니다. 


영화 <첨밀밀>에서 이요와 소군은 저보다 더 자주 타이밍을 놓치고 엇갈립니다. 홍콩에 온 목적,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관 등이 모두 달랐던 두 사람이지만 기어코 사랑이라는 마음에 싹을 틔우는데요. 시간이 흐르며 마치 누군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리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새로운 인물과 사건, 사고들이 등장하는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하필? 지금? 갑자기? 이제 와서? 물음표가 치솟는 순간에는 항상 ‘얼음 동동 샹그리아’를 홀짝였습니다.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두 사람의 아찔한 순간을 지켜보기에 적당히 어질어질한 도수가 유지됐습니다. 스포가 될 대로 되어버린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을 아신다면 짐작하실거예요. 중요한 타이밍을 숱하게 놓치더라도 만나게 될 인연은 결국은 또 기가 막힌 타이밍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걸요. 저는 그날 하필 눈에 띈 포트 와인이 마음에 걸려 이 영화에 국수와 만두를 곁들이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홍콩행 항공권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소군이 이요를 위해 가져온 초콜렛이 주머니 속에서 흐물흐물 녹아 있던 장면을 보고 나니, 지금 홍콩의 더위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거든요. 언젠가 다시 이 영화를 꺼내보고 싶은 날엔 집에 근사한 로제 와인 한 병이 굴러다니고 있길 바라봅니다. 



2024.06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미지 출처ㅣ왓챠피디아

첨밀밀

개봉ㅣ1996, 홍콩

감독ㅣ진가신

출연ㅣ장만옥(이요), 여명(여소군) 

한줄평ㅣ이것도 사랑, 저것도 사랑


칵번 타우니 포트 와인 (Cockburn’s Tawny Port Wine)

산지ㅣ포르투갈, 포르투 

품종ㅣTouriga Nacional, Touriga Franca, Tinta Roriz, Tinto Cao, Tinta Barroca, Touriga Francesa

특징ㅣ바닐라, 무화과, 건포도를 가득 머금은 주정강화와인 

가격ㅣ15유로(해외 구매)

한줄평ㅣ꿀 발라 놓은 듯 매끈한 텍스쳐가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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