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데이> X 마스카 델 타코 리필리띠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리제르바
언젠가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는 어떨까, 여니고니의 제안을 들었을 때부터 사실 후보도 없이 자명하게 맘속에 그린 영화가 있었습니다. 앤 해서웨이와 짐 스터게스 주연의 <원 데이(One Day)>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20대 초반이었으니 (세상에나)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는데요. 주기적으로 보고 싶은 옛 친구처럼, 10년 넘는 세월에 걸쳐 저는 가끔 이 영화를 꺼내보곤 했습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제작 버전의 <원 데이> 시리즈가 나오기도 했지만 구관이 명관인지 옛 친구에 대한 정인지, 개인적으로 여전히 영화 <원 데이>를 더 좋아합니다. 두 주인공의 그 절절한 감정선이 더 진하게 담겼다고나 할까요. 여기에 언젠가 와인을 곁들인다면 화이트보다는 레드, 묵직한 바디감과 긴 여운이 있었으면 했는데요. 때마침 집에 쟁여 둔 프리미티보를 발견하고는 N번째 <원 데이> 상영회를 시작했습니다.
영화가 어느 한 인물의 시점에 초점을 맞춰지진 않았지만, 여자인 저에게는 아무래도 여자 주인공 ‘엠마(앤 해서웨이)’의 감정선이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 파티에서 ‘덱스터(짐 스터게스)’를 만난 엠마는 그날로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둘의 타이밍은 결코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데요. 졸업 후 엠마와 떨어져 지내게 된 덱스터는 엠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유로운 연애 생활(a.k.a. 망나니 생활)을 지속하죠. 첫 만남의 로맨틱한 무드는 잊은 채(혹은 잊은 척 한 채) 엠마와 덱스터는 뭐든 얘기하고 나누는 찐친으로 지내며 서로 다른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기도, 각자 삶에서의 혹독한 매운 맛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여러 번 이 영화를 돌이켜본 입장에서 엠마에게 덱스터란 존재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애증의 손가락’이랄까요. 이뤄지지도 않을 거면서 자꾸만 맴도는 첫 사랑, 징하게도 맞지 않는 타이밍,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망할 관계. 그렇게 무려 20년 가까이 돌고 돌아 맞이한 이들의 ‘원 데이'는 그래서 더욱 애잔하기만 합니다.
결말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여운이 진하게 남는 이야기임은 분명합니다. 이번에도 또 한 번, 어쩌면 우리네 삶의 거의 모든 건 타이밍일지 모른다는 자조 섞인 결론이 오래도록 맴돌았죠. 비오는 날에 녹진한 건포도와 건자두, 씁쓸한 다크한 초콜릿 향의 묵직한 프리미티보와의 조합이 그래서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가 스멀스멀 생각나던 때의 저는 몸도 마음도 조금은 눅눅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이열치열의 논리와 비슷하게, 쳐질 땐 아예 더 확실하게 쳐지게 하는 것도 다시금 텐션을 끌어올리는 데 (경험상) 좋은 방법인 것 같았거든요. 그러고 얼큰하게 오른 취기로 한숨 거하게 낮잠까지 자고 나면 얼마나 개운하게요. 원 데이, 좀처럼 희박한 텐션의 장마철을 저는 이렇게 달래고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밀린 빨래에마저 타이밍을 운운하면서요.
2024.07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개봉ㅣ2012, 미국
장르ㅣ드라마
출연 | 앤 해서웨이(엠마), 짐 스터게스(덱스터)
한줄평ㅣ있을 때 잘하자
마스카 델 타코 리 필리띠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리제르바 2019 (Masca del Tacco Li Filitti Riserva Primitivo di Manduria)
산지ㅣ이탈리아 만두리아
품종ㅣ프리미티보
도수ㅣ14.5%
특징ㅣ건포도, 건자두, 후추, 커피, 다크 초콜릿
가격 | 3만원대
한줄평ㅣ씁쓸함과 부드러움의 공존, 그리고 풀바디의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