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스 투 줄리엣> X 프레스코발디 포미노 비앙코
이탈리아 배경의 영화X이탈리아 와인은, 언젠가 제대로 한 번 시도하리라 벼르던 저의 방구석 여행 치트키입니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울까 싶지만, 사실 구미에 딱 맞는 페어링을 찾기가 어려웠던 게 그만큼 'Made in Italy'의 세계는 방대하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바라는 건 이런 거였어요. 이탈리아 소도시 특유의 연노란 색감이 잘 담겼으면서도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판타지는 아닌 일상적 풍경들. 그리고 그 여유로운 무드를 해치지 않는 순한 맛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였음 했죠. 곁들임 와인으로는 단번에 화려함을 과시하기보다는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수한 매력의 이탈리아 화이트면 좋을 것 같았고요. 주절주절 쓰고 보니 저란 사람은 정말이지 더없는 F임을 새삼 느낍니다.
두서 없는 그 느낌적인 느낌을 찾아 헤맨지도 한참, 원하는 건 정작 의외의 곳에서 튀어오르는 법인가 봅니다. 어느 주말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본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제가 바라던 그 색감을 발견한 거예요. 배경은 이탈리아 베로나(Verona), 영화는 <레터스 투 줄리엣(Letters To Juliet)>이었는데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도시로 알려진 베로나를 여행하는 작가 지망생 소피가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발견한 50년 전 러브레터에 직접 답장을 쓰고, 그걸 받은 클레어가 손자 찰리와 함께 베로나로 오게 되면서 소피와 동행해 본격적으로 첫사랑을 찾아나서는 이야기.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햇살 가득 노란빛의 이탈리아 소도시 풍경이 일단은 먹고 들어가는 뷰 맛집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맛보기 장면에 홀린 저는 그날로 풀버전의 영화를 주행했습니다.
함께한 와인은 계획대로(!) 'Made in Italy'입니다. 샤도네이에 피노 비앙코(피노 블랑)이 조금 가미된, 은은하고 섬세한 매력의 화이트 와인으로요. 옅은 금색빛에 파인애플, 망고와 같은 열대과일의 풍미가 베로나의 특유의 노란 색감과 닮아 있었고요. 직접적으로 아로마를 강하게 드러내진 않지만 충분히 빛이 나는 조연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처음에 꽤 날카로웠던 산도는 시간이 갈수록 우아하게 누그러져갔죠. 한동안 투닥대기만 하던 화면 속 소피와 찰리도 이제 조금씩 서로를 보는 시선이 므흣해지기 시작하네요. 이렇듯 낭만적인 여행길입니다.
한바탕 방구석 여행을 하고 나니, 당장이라도 이탈리아행 티켓을 끊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우선은 참기로 합니다. 사실 얼마 전 저는 태국 방콕에서 신나게 여름 휴가를 즐기고 왔거든요. 팔다리는 까맣게 그을렀고 체력과 지갑은 많이 얄팍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럴 땐 F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영화 한 편에 와인 한 병이면 어디든 떠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 여행지는 어디? 찜해 둔 와인 리스트를 훑으며 돌아올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뿐입니다.
2024.07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개봉ㅣ2010, 미국
감독ㅣ게리 위닉
출연ㅣ아만다 사이프리드(소피), 크리스토퍼 이건(찰리)
한줄평ㅣ이탈리아 소도시앓이 주의
프레스코발디 포미노 비앙코 (Frescobaldi Pomino Bianco)
산지ㅣ이탈리아 토스카나 프레스코발디
품종ㅣ샤도네이 90%, 피노 비앙코 10%
특징ㅣ배, 파인애플, 사과, 라임, 약간의 바닐라
가격ㅣ3만원대
한줄평ㅣ당돌하게 치고 나오지 않는, 그렇지만 충분히 빛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