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X 대시우드 소비뇽 블랑
어떤 일을 반드시 끝내야하는 시점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래서 더 이상 그 일을 미룰 수 없을 때, 그래서 매일매일 한계치에 도달할 때, 고단한 노동에 대한 나만의 작은 보상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가 될테니 퇴근하면 치킨에 맥주를 먹어야지,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주말에는 가만히 누워 있는거야, 다음달 말레이시아 휴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와 같은 소소한 것들입니다. 단순하지만 앞으로 보상받을 행복한 순간을 의식적으로 상기하다보면 힘든 순간을 조금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야근으로 꽉 찬 한주를 버티게 한 작은 보상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소비뇽 블랑을 함께 하는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월화수목요일 야근의 연속에서 <리틀 포레스트>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 걸 보면, 주인공 혜원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간절했나봅니다.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와 동시에 소비뇽 블랑을 연관어처럼 떠올렸습니다. 소비뇽 블랑은 풀내음을 가득 머금은 가볍고 산뜻한 화이트 와인인데요. 자기만큼 신선하고 푸릇한 채소와 정말 좋은 궁합을 이룹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소비뇽 블랑이 <리틀 포레스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왜 내려온거냐”라는 은숙의 질문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배 고파서”라고 대답한 혜원은 고향에 머무르는 사계절 내내 땅에서 자란 채소들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뚝딱 차려먹습니다. 그야말로 소비뇽 블랑을 부르는 맛입니다.
이 영화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고 있었던 저는 함께 할 음식으로 잘 익은 참외를 얇게 썰고 부라타 치즈 한 덩이를 올려 참외 샐러드 한 접시를 준비했습니다. 요즘, 참외가 참 달고 맛있습니다. 감자 한 덩이도 노릇하게 구워 직접 만든 새콤한 차지키 소스에 찍어 먹었습니다. 감자는 지금부터 9월까지 제철입니다. 제가 준비한 음식은 영화에 나오는 음식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며칠 동안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배달 음식으로 배를 채웠던 저도 배가 많이 고팠나봐요. 혜원을 따라 싱그럽고 포슬포슬한 여름의 맛을 마주하니 이제야 배가 부릅니다(아직 인생의 답은 찾지 못했지만요). 매년 5월 첫 번째 금요일은 소비뇽 블랑의 날(International Sauvignon Blanc Day)이라고 해요. 비로소 소비뇽 블랑의 계절이 시작됨을 알리는 의미입니다. 지금 가장 맛있는 여름의 맛을 <리틀 포레스트>와 함께 해 흐뭇한 여름밤입니다.
2024. 06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개봉ㅣ2018, 한국
감독ㅣ임순례
출연ㅣ김태리(혜원), 류준열(재하), 문소리(혜원 엄마), 진기주(은숙)
한줄평ㅣ누구나 저마다의 삶이 있으니 괜찮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인데 보면 볼수록 자꾸만 배가 고파진다
대시 우드 소비뇽 블랑 (Dashwood Sauvignon Blanc)
산지ㅣ뉴질랜드, 말보로
품종ㅣ소비뇽 블랑
특징ㅣ잔디, 허브, 자몽 등 싱그러운 풀내음.
알콜ㅣ13%
가격ㅣ2만원대
한줄평ㅣ풀내음 속 생레몬즙을 짠 것처럼 폭발적인 산미. 올해 발견한 가성비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