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팅 라운드> X 라 포다 알바리뇨
남의 연애를 염탐할 때면 어김없이 술이 당깁니다. 물론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주종이 다르긴 하죠. <나는 솔로>엔 소주나 막걸리를, <환승연애>엔 맥주나 하이볼을, <돌싱글즈>엔 싱글몰트 위스키를 곁들이곤 했는데요. 이날은 다름아닌 와인이었습니다.
미국판 소개팅 프로그램 <데이팅 라운드>를 보고 있었거든요. 막 처음 만난 남자와 여자가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자신이 좋아하는 품종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이었죠. 시라,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이 좋다는 여자에게 '아직 메를로의 맛을 잘 모르겠다'며 피노가 좋다는 남자. 그런 그를 지그시 응시하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귀엽게 바라보는 남자. 그 미묘하고 달달한 공기에 한껏 이입한 저는 결국 며칠 전 사둔 와인을 오픈했습니다. 시라,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피노도 아닌 저의 선택은 알바리뇨였는데요. 진득한 레드로 넘어가기 전, 약간의 워밍업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으니까요(이미 상상 소개팅 중). 가볍고 상큼한 화이트, 크게 취향을 타지 않고 꿀떡꿀떡 넘어갈 알바리뇨야말로 첫 만남의 어색함을 달래줄 식전주로 제격일 것 같았습니다. 톡 쏘는 레몬향이 훑고 간 자리에 꿀, 복숭아향이 뭉근하게 입안을 맴도는. 이윽고 남녀의 눈빛이 한층 더 반짝였고 저의 눈도 반짝였습니다.
<데이팅 라운드>의 각 에피소드는 만남을 의뢰한 주인공이 몇 명의 데이트 상대를 차례로 만난 후 최종적으로 맘에 드는 상대를 선택하는, 소위 ‘결정사’ 시스템과 같은 플롯입니다. 은근 마마보이인 회계사, 소개팅 초보 레즈비언, 사별 후 새로운 사랑을 찾는 노년 신사 등등. 직업도 나이도 다양한 사람들의 소개팅 현장을 보고 있자면, 전 세계 어디든 짝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얼마나 더 많은 잔을 부딪혀야 내 짝을 찾을 수 있을런지. 각 에피소드마다 온갖 오지랖 본능에 충실하며 시즌 1을 호로록 주행해버렸어요. 그리고 남은 시즌 2를 위해서라도 다음번 와인 쇼핑 때 알바리뇨를 쟁여야겠다고 다짐했죠. 혹시나 무르익을 때를 대비해 시라와 메를로도요(는 핑계고 그냥 와인을 양껏 사겠다는 의미). 이렇게 말하는 저는 사실 (안타깝게도) 실제로 소개팅에서 와인을 마셔본 적은 없고요. 소맥을 좋아하는 마지막 소개팅남과 살고 있습니다.
2024.06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개봉ㅣ넷플릭스, 2020, 미국
장르ㅣ연애 리얼리티 시리즈
한줄평ㅣ가벼우면서도 녹진한 미국 남녀 소개팅의 현장
라 포다 알바리뇨 2019(La Poda Albariño)
산지ㅣ스페인, 리아스 바이사스(Rías Baixas)
품종ㅣ알바리뇨
도수ㅣ12.5%
특징ㅣ레몬, 시트러스, 꿀, 복숭아, 젖은 돌멩이
한줄평ㅣ첫 인상 합격인 그/그녀, 그리고 해산물과 함께라면 금상첨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