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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mja Oct 25. 2024

그날의 피노 그리지오

<비하인드 허 아이즈> X 델리보리 피노 그리지오 델레 베네지에


장마가 막 시작되던 초여름 어느 주말 오후였습니다. 그날은 당장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늘에는 구름이 아주아주 많았고, 영국 드라마 <비하인드 허 아이즈(Behind her eyes)> 시청을 정주행하겠다고 마음 먹은 날이었습니다. 드라마는 각 회차별로 1시간 이내의 러닝타임으로 총 6화. 영화와 비교하면 길지만 드라마치고는 하루 날 잡고 완주행할만한 분량이었죠. 드라마는 정신과 의사(데이비드)와 그의 아내(아델), 그리고 부적절한 관계에 놓인 싱글맘 간호사(루이즈)와의 불륜 삼각구도로 시작되는, 자극적인 맛입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얼키설키 얽혀버린 남녀 관계 속 거짓과 의심, 우울, 불안 등 먹구름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깔려 있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날의 하늘처럼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드라마, 장르가 스릴러입니다.   


드라마 <비하인드 허 아이즈> 스틸컷. 여기서 잠깐, 와인샵 고 


저는 일단 2화에서 드라마 시청을 잠시 멈추고 화이트와인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를 사러 집밖을 나섰습니다. 데이비드가 루이즈 집에 찾아갔을 때 루이즈가 마시고 있던 와인이 피노 그리지오였거든요. 묘한 기류 속 두 사람이 피노 그리지오를 홀짝이는데, 그 때 피노 그리지오가 왜 그리 마시고 싶었을까요. 오늘은 피노 그리지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사실 스토리적으로나 그날의 날씨로는 산뜻하고 가벼운 피노 그리지오보단 좀 더 묵직하고 끈적한 느낌의 진판델이 더 비슷한 결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날 저는 혼자 피노 그리지오 한병을 다 비우고 드라마 정주행을 마쳤는데요. 시트러스 향과 신선한 과일향, 미네랄이 풍부했던 피노 그리지오는 드라마와 확실히 다른 결의 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피노 그리지오는 보는 내내 미스테리한 분위기에 감정이 크게 물들지 않게 어깨를 톡톡 치켜올렸던 것 같습니다. 만약 진판델을 선택했다면 5화 쯤엔 물에 젖은 솜뭉치가 되었을 것 같다는, 내 고집이 옳았다는 고집을 또 부려봅니다. 페어링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겠지만 <비하인드 허 아이즈>를 본다면 어떤 종류든 술은 꼭 필요할거예요. 와인을 포함해 다양한 술을 마시는 장면이 꽤 자주 나오거든요. 그러니 준비가 필요합니다. 언제, 어떤 술이 필요할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술은 언제나 부족한 것보다 넉넉한 게 낫잖아요? 



2024.06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미지 출처ㅣ넷플릭스


비하인드 허 아이즈 (Behind her eyes)

개봉ㅣ2021, 영국

감독ㅣ에릭 리츠터 스트랜

출연ㅣ시모나 브라운(루이즈), 이브 휴슨(아델), 톰 베이트먼(데이비드)

한줄평ㅣ비가 내리는(또는 내릴 것만 같은) 주말, 이불 속에서 정주행하기 딱 좋은



델리보리 피노 그리지오 델레 베네지에 2019 (Delibori Pinot Grigio delle Venezie) 2019

산지ㅣ이탈리아, 델레 베네지에 

품종ㅣ피노 그리지오 

특징ㅣ신선한 자몽, 레몬 계열의 과일향, 복숭아, 서양배, 옅은 레몬색, 풍부한 미네랄 

알콜ㅣ12%

가격ㅣ2만원대 

한줄평ㅣ사실은 오징어 튀김과의 조합이 더 기억나는 가성비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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