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X 살로몽 운트호프 프란시스쿠스 그뤼너 벨트리너
간만에 썸머를 떠올리게 된 건, 막 봄을 지나온 6월 초였습니다. 동네 와인샵 사장님의 사심 그득한 추천에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을 집으로 데려왔죠. 난생 처음 맛본 그뤼너 벨트리너란 품종은 뭐랄까, 어렸을 때 처음 맛본 슈팅스타 아이스크림을 같았달까요. 제 식대로 유치하게 표현하자면 입 안에 ‘뿅’ 감겨서는 ‘팡팡’ 터졌습니다(스파클링 와인은 아니지만). 근데 그 환희의 순간에 희한하게도 이 영화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창고에 있던 선풍기를 개시하고 아주 오랜만에 영화 <500일의 썸머>를 꺼내어 봤습니다.
<500일의 썸머>는 한 남자가 500일 동안 썸머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진지해지지 말고 가볍게 즐기며 만나자’는 썸머와 그녀의 제안에 머리론 동의하는 척하면서도 가슴으론 한없이 진지한 톰. 시간이 갈수록 썸머에게 점점 깊이 빠져드는 톰과는 달리 썸머는 오히려 내 것인듯 내 것 아닌 듯 멀어지는 것만 같죠.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더 이상의 소상한 스포를 하진 않겠지만, 밀당의 기술이 궁금하다면 다름아닌 이 영화를 보시면 됩니다. 근데 이날 그뤼너 벨트리너를 두고 하필 왜 저는 썸머가 생각이 났을까요. 뒤늦게 추적해보는 나름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첫 모금을 마셨을 때의 그 ‘뿅’ 하던 순간이, 영화 속 톰이 썸머에게 처음 느낀 강렬한 스파크와 비슷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가볍고 여리여리하면서도 청량한 와인의 맛은 꼭 썸머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습니다. 은은하게 퍼져오는 시트러스의 상큼함과 꽃향은, 썸머가 만약 향수를 쓴다면 이런 향이 아닐까 싶기도 했죠. 뭐 말하자면 그런 거고 좀 더 솔직단순하게는, 때마침 여름이 오고 있었고 더없이 여름을(그리고 썸머를) 닮은 와인이었습니다.
별다른 안주랄 것도 없이 치즈 몇 조각을 두고 저만의 소소한 여름맞이 의식을 치뤘습니다. 몇 번이나 본 영화를 마치 처음처럼 볼 수 있었던 데는 그뤼너 벨트리너의 산뜻한 공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딱 한 잔 정도의 와인이 남았을 무렵 엔딩 크레딧이 올랐습니다. 선풍기 옆에서도 후끈 열이 오르는 걸 보니 정말 여름인가 봐요(술기운 감안). 날이 선선해지기까지 견뎌야 할 이 뜨거움이 때론 막막하지만, 그래도 여름이 (그리고 썸머도) 마냥 싫지만은 않습니다. 바야흐로 화이트 와인의 계절이고, 또 이 여름이 지나면 반드시 가을이 올 걸 아니까요.
2024.06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개봉ㅣ2010, 미국
감독ㅣ마크 웹
출연ㅣ조셉 고든 레빗(톰), 주이 디샤넬(썸머)
한줄평ㅣ20대 나의 감상평은 '썸머 나쁜X', 30대 나의 감상평은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은 어쩌면 타이밍'
살로몽 운트호프 프란시스쿠스 그뤼너 벨트리너 2021 (Salomon Unhof Franciscus Gruner Veltliner)
산지ㅣ오스트리아, 크렘스탈
품종ㅣ그뤼너 벨트리너
특징ㅣ드라이, 가벼운 바디, 자몽과 같은 시트러스, 은은한 꽃향, 스파클링이 아니지만 마치 스파클링인 듯한 청량함
알콜ㅣ12%
가격ㅣ정가 56,000원, 세일하면 3만원대
한줄평ㅣ나의 최애,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위협하는 마성의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