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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마시면서 진실 게임할래요?

<완벽한 타인> X 제라르 베르트랑 또따벨

by gamja

스카이 다이빙 직전, Y 언니가 짧은 유언을 남기고 뛰어 내렸습니다. “내 휴대폰 잠금 비밀번호, xxxx이야. 만약에 혹시라도 내가 죽게 되면 내 휴대폰 좀 초기화 시켜줘. 남편이 내 휴대폰 보면 안돼.” 다행히 언니의 유언을 실행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너무나 강렬한 유언을 남기고 하늘에 몸을 던진 언니의 휴대폰 속이 궁금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대체 뭐가 있길래. 혹시 언니가 외도를? 하지만 무사히 살아 돌아온(?) 언니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실 별거 없어. 그냥, 남편이 몰랐으면 하는 것들 있잖아. 부끄러운 것도 있고, 혹시 남편이 오해할 수도 있고. 내가 죽으면 해명할 수도 없으니 초기화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언니 말대로 휴대폰에는 나를 둘러싼 정보가 너무나 많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최근 결제 내역은 물론 자산은 얼마인지,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에 있었는지도. 좀 더 집요하게 추적해 보면 아마 최근 주문한 속옷의 사이즈까지 알아낼 수 있을 걸요?



110332_2502400_1732154598239865073.jpg 영화 <완벽한 타인> 스틸컷. 집들이 음식에 여러 모로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 등장


그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휴대폰을 두고 결말이 뻔할 게임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룰은 단 하나.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휴대폰으로 오는 문자, 전화, 이메일까지 모든 내용을 서로 공유하는 것인데요. 영화 <완벽한 타인> 이야기입니다. 석호(조진웅)와 예진(김지수) 부부의 집들이에 34년 지기 친구들 태수(유해진)와 준모(이서진), 영배(윤경호)가 모입니다. 태수의 아내 수현(염정아)과 준모의 아내 세경(송하윤)도 함께 말이죠. 영배에게는 애인이 있지만 이날 애인이 몸이 좋지 않아 혼자 왔고요. 이렇게 7명이 모인 자리에는 속이 꽉 찬 아바이 순대에 매콤새콤한 명태회무침, 따끈하게 쪄낸 술빵, 절대 실패할 일 없는 만석 닭강정, 시원한 물회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게찜, 물곰탕까지 이들의 고향인 속초식 음식들이 줄줄이 코스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근황을 나누고 농담도 던지며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저는 정말 말리고 싶었지만) 예진의 제안으로 이 무서운 게임이 시작됩니다.


저는 묘한 긴장감이 이어지는 영화에 그르나슈와 시라, 까리냥을 블랜딩한 레드 와인, 제라르 베르트랑 또따벨을 곁들였습니다. 영화의 결과 비슷하다거나 상호보완의 역할을 하는 와인은 아니고요. 단순하게도 영화 속 테이블 위에 등장하는 와인 중 하나입니다. 영화에는 앞서 소개한 속초식 음식들이 다양하게 오르는데, 제라르 베르트랑 또따벨은 테이블 위 메인 메뉴가 물곰탕으로 교체된 이후 잠시 화면에 비친 와인입니다. 오픈 초기 쨍하고 날카로운 스파이시한 향과 거친 타닌은 처음부터 마치 영화의 엔딩을 예감하는 듯 보였는데요. 그 예상대로 그동안 서로에게 숨겨왔던 비밀들이 하나씩 까발려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비밀이 모두 바람은 아닙니다. 예진과 수현은 겉으론 친한 척 살가운 대화를 나누던 사이지만 수현이 다른 사람에게 예진에 대한 험담을 해온 사실이 들통났고, 태수는 텔레그램 속에서 알게 된 여자가 매일 밤 10시 외설적인 사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 영배의 휴대폰과 바꾸는 꾀를 쓰다가 더 큰 오해를 사고 맙니다. 예진은 성형외과 의사인 남편 석호 몰래 가슴 성형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고, 석호는 아내 몰래 대출을 끌어 모아 투자를 했지만 사기를 당한 상황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요. 그야말로 개판입니다. 그치만 영배의 비밀은 일단 비밀로 지켜주고 싶습니다. 석호와 예진 부부의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대부분의 스토리가 흘러가는 동안 영화 속 와인을 함께 곁들이다보니 저는 마치 한 테이블에 있는 것처럼 참견도 하고 코웃음을 치기도 하며 나름대로 한껏 감정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나저나 이 와인, 영화에서는 물곰탕과 함께 등장했지만 사실은 순대와 훌륭한 조합을 보였고요. 만석 닭강정을 상상해도 저는 찬성입니다.



110332_2502400_1732154641630842132.jpg 영화 <완벽한 타인> 스틸컷. 파국을 부르는 게임


서로가 서로에게 분노하지만 따지고 보면 서로 할말이 없는 상황에 (혹은 와인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은 대게 옳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거짓말이 더해질 테고요.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이 아픕니다. 온갖 해악(비밀)으로 가득한 항아리(휴대폰)를 열어 세상(부부)에 재앙을 가져온 것은 판도라(예진)의 잘못일까요, 해악 그 존재 자체가 잘못일까요. 아니면 호기심이 잘못인 걸까요. 무엇이 됐든 저는 앞으로도 모르고 싶습니다. 최근 속옷 사이즈가 미디움에서 라지로 바뀐 것도 남자친구는 영원히 모르면 좋겠고요. 유언장에는 휴대폰 초기화를 부탁한다는 한 줄을 추가해야겠습니다.




LETTER FROM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 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완벽한 타인

개봉ㅣ2018, 한국

감독ㅣ이재규

출연ㅣ유해진(태수), 조진웅(석호), 이서진(준모), 염정아(수현), 김지수(예진), 송하윤(세경), 윤경호(영배)

한줄평ㅣ죽음의 게임은 생각도 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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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베르트랑 또따벨(Gerard Bertrand Tautavel)

산지ㅣ프랑스, 알자스

품종ㅣ그르나슈, 시라, 까리냥

도수ㅣ15%

특징ㅣ스파이시, 후추, 가죽, 블랙베리 등이 도드라지며 거친 타닌의 묵직한 레드 와인

가격ㅣ2만원대

한줄평ㅣ오픈 후 30분 브리딩을 거치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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