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재스민> X 빌라 안티노리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정말이지 남의 떡이 참 커보입니다. 매일 개미처럼 뚠뚠 길을 나서는 출퇴근러보다 프리랜서의 자유가 더 낭만 있어 보이는가 하면 방금 장바구니 속 새 코트를 질렀는데, 그새 다른 브랜드의 코트가 눈에 들어오는 건 또 어떻고요. SNS는 그야말로 떡 잔치입니다. 온통 무지개떡처럼 반짝이는 피드들 사이 저의 일상은 마치 백설기처럼 밋밋하게 느껴지기 일쑤죠(백설기에겐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실체 없는 허상일지 모르는 무지갯빛에 쉽게 동하고 또 시큰둥해지곤 하는 걸지도요. 그래 봤자 다 비슷비슷한 백설기일지 모르는데 말이에요.
그럼에도 제가 만약 영화 <블루 재스민> 속 여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의 SNS 피드를 본다면, 아마도 눈이 휘둥그레해졌을 것입니다. 궁궐 같은 집과 정원, 화려한 명품 옷에 비싼 주얼리,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스탠딩 파티. ‘저게 다 진짜일까’를 논하기 전에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뉴욕 리치 언니의 삶을 일단은 부러워는 했겠지요. 물론 저의 상상일 뿐, 실제로 영화에 재스민의 SNS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만큼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남편의 외도와 범죄로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은 이후에도 그녀는 과거에 누리던 명예과 부의 ‘느낌’을 놓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죠. 빈털털이 백수라는 말 대신 내뱉고 다니는, 최대한의 있어빌리티를 위한 그녀의 도미노 같은 거짓말은 결국에 더 큰 파국을 불러오지만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재스민에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는 대로 믿고 살 뿐.
재스민보다는 시나몬 향이 감도는 와인을 곁들이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의 심정은 다소 복잡했는데요. 지독한 허언증 환자, 거짓말쟁이라고만 재스민을 욕하기엔 마음 한 구석에서 최소한의 공감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처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나 쫄딱 망했소’ 곧이 곧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 명품 대신 보세 옷만으로 살 수 있을까. 나를 동경하는 SNS 속 팔로워들에게 시원 담담하게 거밍아웃(거지+커밍아웃, 내가 만든 단어 주의)을 과연 할 수 있었을까, 하고요. 나 또한 SNS에 보여주기식의 일상을 공유하고는 달리는 댓글로 뿌듯해 하는, 재스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 아닌가, 하고요. ‘그래, 산 속에 사는 자연인도 아니고 남들 시선 다 무시하고 사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적당히 합리화하고도 여전히 씁쓸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조금은 무게감이 있는 레드를 페어링하길 잘했다, 싶었죠. 겉으론 크리미해 보이지만 시나몬, 페퍼 등 스파이시한 향신료의 터치가 꽤 강하게 훑고 지나가는 ‘빌라 안티노리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를 홀짝이며 멈출 수 없는 재스민의 거짓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 그녀를 비난 반 안타까움 반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와인도 제 심정도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싶으면서도 결국에 그런 시선에서 진정 자유롭고 싶은 저입니다. ‘남이 뭐 중요해? 내가 제일 중요하지’라고 되뇌이면서도 실제로 ‘어떻게 비춰질까’ 전전긍긍하는 이런 제가 싫지만, 어쩌겠어요. 조금씩 타이르고 구스를 밖에요. 그렇다고 당장 입고 나갈 옷이 없는 마당에 쇼핑을 완전히 끊는다거나, 좋은 장소엘 가서 인스스 하나 올리지 않는다거나, 그렇게 한 번에 극단적으로 갈 순 없잖아요? 마침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이고, 또 이번 주말 마침 호캉스 계획이 있기도 하고. 지갑도 카메라도(실은 제가) 근질근질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이건 어디까지나 내 만족일 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는 절대 아니라는 둥의 거짓부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하지 않으렵니다. 네, 저는 가끔 자랑하고 싶은 인간입니다. 저 겨울 옷도 옴팡지게 샀구요, 남산 뷰 호캉스 가서 인스스도 맘껏 올릴 생각입니다. 어때요, 좀 무지개떡 같나요?
2024.11
Letter From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개봉ㅣ2013, 미국
감독 | 우디 앨런
출연ㅣ케이트 블란쳇(재스민), 샐리 호킨스(진저)
장르ㅣ드라마
한줄평ㅣ무거운 스토리 전개에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재스민의 패션 센스, 제대로 미쳐버린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
빌라 안티노리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2021(Villa Antinori Chianti Classico Riserva)
산지ㅣ이탈리아, 키안티 클라시모
품종ㅣ산지오베제 외 기타
도수ㅣ14%
특징ㅣ체리, 낭낭한 오크향, 후추, 시나몬, 두드러지는 복합미
가격ㅣ3만원대
한줄평 | 가을과 겨울 사이 제격인 레드, 고기와 함께라면 더없이 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