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한 마디가 견적을 바꿨다

기술 유출보다 무서운 건 말실수였다

by 왕감자감자


팀장이 부임하고 두 달쯤 뒤였다.
우리 팀에는 연초부터 메인거래처 이원화라는

핵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고

내가 전담하고 있었다.


단가 협상의 키를 쥐고 있었던 만큼,
수개월 동안 사전조사부터 공장 방문,

샘플 검토, 계약서 검토까지

내 손을 안 거친 게 없었다.


그날은 거의 마지막 단계였다.
이미 거래처 대표 및 실무자 선에서

합의는 끝난 내용이고

공급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무겁지만 가벼운 미팅 자리였다.


거래처로 출발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

"오늘 미팅엔 새로 오신

팀장님도 참석하실 거예요.
계약 체결이라는 중요한 자리인 만큼

직접 만나 뵙고 싶다 하셔서요"


모든 건 실무자 선에서

수개월에 걸쳐 조율이 된 상황이고

가볍게 도장만 찍는 자리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회의실에 앉은 지 10분쯤 지났을까.
공급처 대표가 계약서를 가볍게 확인 후

도장을 찍으려는 찰나에 물었다.


“이 부품은 사급 해주시는 게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해당 부품은 저희가 제공하는 항목입니다’
라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저희가 공급하지 않습니다."


정적.


공급처 대표의 표정이 그 순간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도장이 계약서 위가 아닌

인주통 옆으로 내려졌다.


“… 지금까지와 말씀이 다르신데요?”
“그럼 견적을 다시 내야겠네요.”
“사급이 아니면 견적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순간 회의실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문제의 부품은
생산하는 제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였다.
단가도 단가지만, 기술 유출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그 부품만큼은

절대 외부 생산을 맡기지 않았다.


중국 자회사에서 별도 생산

→ 국내로 수입

→ 사급을 통한 제품생산

이건 수십 년이 넘게 지켜온

우리 회사의 안전장치 그 자체였고,
이미 수차례의 서면 조율과

기술자료 공유까지 끝낸 항목이었다.






“잠시만요.”
나는 말끝을 붙잡았다.


“대표님, 해당 부품은 당사에서

공급하는 사급품이 맞습니다.
팀장님이 다른 제품과 헷갈려하신 것 같아요

이 부품은 사급이 맞습니다"


대표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지만,
내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8.png 계약서




계약 체결은 문제없이 조용히 마무리됐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팀장이 말을 꺼냈다.


“그 부품, 우리가 주는 거였어?”

“네. 사급이고요. 기술 유출 우려 때문에

꼭 저희가 공급해야 합니다.

계약서에도 언급되어 있고

제품설계도면에도 기재해 놓았어요”

“아… 미안. 그런 줄 몰랐어.”

“괜찮습니다. 별문제 없이 계약되었으니...”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 속은 살얼음이었다.






미팅 후 사무실로 복귀해서
그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말 한마디가, 아니 말 한마디의 타이밍이
이렇게 많은 걸 흔들 수 있다는 걸 다시 느꼈다.


팀장의 무지도 분명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찜찜했던 건,
내 준비의 부족함이었다.


‘왜 나는 미리 브리핑하지 않았을까.’
‘왜 그 한 문장을 회의 전에 공유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그저 정정하는 역할에 머물렀을까.’


그날 이후,
나는 외부 미팅 전에는

미리 내용 검토 및 숙지사항을

한번 더 체크하기 시작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고,
누가 어떤 답변을 해야 하는지까지.

모든 걸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미팅에 있어서는

사전에 준비 한 시나리오대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그날 회의실에서 배웠다.

회의라는 건

상대를 설득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라는 걸.






이후 계약은 무사히 체결하며

핵심 아이템의 공급사 이원화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날 나는, 계약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


실무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한 문장을 정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문장이 나오지 않게 만드는 준비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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