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퇴사하겠습니다

조건이 아니라, 방향을 찾기 위해

by 왕감자감자


“그만두겠다고?”

그 말은 팀장에게 너무 갑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부산이 있는 그에게 유선으로 업무보고 직후

퇴사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0초, 아니 15초쯤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감자 대리, 지금 뭐든 할 수 있는 위치잖아.
이런 기회, 본사에서는 흔치 않아.
진짜… 돌이킬 수는 없는 거야?”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새 C아이템의 A부터 Z까지 모든 부분을

담당하고 SCM을 총괄하고 있었다.
실무 전권을 가진 채 수많은 결정을 했고,
그 결과는 성과로 이어졌다.


회사 내 누구보다
이 아이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되었고,
그만큼 많은 책임과 신뢰를 동시에 받았다.





"팀장 시켜줄게 조금만 참아"


퇴사 의사를 밝히자,

바로 서울로 올라올 수는 없었기에
그는 곧바로 본사에 연락을 돌렸다.


며칠 후,
나의 첫 번째 팀장이었던

SCM 팀장과

직접 만나는 자리가 잡혔다.


“감자 대리도 알잖아.
나 이제 1~2년밖에 안 남았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다음 SCM팀장, 감자 대리로 해줄게.
아니, 너 말고는 사실상 할 사람이 없어.”

뜻밖의 제안이었다.



이 조직처럼 보수적인 곳에서
대리에게 차기 팀장 자리를 제안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자리에 오를 만큼의 성과는 인정받았구나’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팀장’이라는 이름, ‘리더’라는 직책.


팀장이라는 자리

우리 회사정도의 규모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인 카드였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입사 4개월 만에 팀이 해체된 뒤,
나는 거의 3년 가까이
실질적인 1인 팀으로 움직여야 했다.


세관과 몇 날 며칠을 싸우기도 하고

밤새 업무도 하고

현장에 나가 지게차도 타면서


모든 사건사고를 수습하는
조직의 빈틈을 메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함께라고 했지만 늘 혼자였다


문제가 생기면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고

어떤 결정을 내려도

결국엔 내가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채워온 일정에
하루도 온전히 쉰 적이 없을 만큼

꽉 차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허전했다.


프로젝트는 굴러갔고,
성과는 수치로 남았지만,
‘함께’라는 감각은 늘 없었다.





결국에 나의 성장을 원했다


물론 팀장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회사 소속이었고,
본사 업무는 대부분 나의 몫이었다.


결재 구조, 보고 체계, 실무 진행.
사실상 내가 ‘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SCM팀장과의 미팅 외에도

회사 내에 나와 연관 있는

모든 팀장들과 미팅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수많은 제안을 해왔다.


직책 조정, 인력 충원,
더 큰 프로젝트의 주도권까지.


진짜일 수도 있고

단순 퇴사를 막기 위한 회유책일 수도 있었다.


그 말들 속에서 나는
존중받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그게 곧 ‘남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나는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나의 성장과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방향을 원했다.


매일 같은 ERP,
같은 SKU,
같은 구조.


익숙하지만 단조로운 하루 속에서
‘나는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그 질문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래서, 나는 나가야 했다.


새로운 조직에서
더 새로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그건 이 회사를 떠나야만
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떠나는 마지막날

본사 전무와 식사를 하고 난 후

지갑을 하나 사주면서 말했다.


"왕감자 대리 진짜 퇴사해야겠어?"


"더 배워야 할 게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다른 환경에서 한 번

부딪혀보려 합니다.”


“떠나게 돼서 아쉽고

언제든지 돌아올 생각 있으면 연락해”



그 말에 담긴 마음은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느리게 걷더라도,
조금 더 불확실하더라도.

나는 이제,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내가 쌓은 것,

그 위에 다른 누군가가 더 좋은 길을 만들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다음 무대로 걸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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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찾기 위해


감자는
흙 속 어딘가에
거꾸로 심겨도 결국 뿌리를 내리고,
제 방향으로 싹을 틔운다.


겉은 울퉁불퉁하고,
흙을 털어내야 그 속을 볼 수 있지만,
그 안엔 묵직한 영양과,
단단한 시간들이 들어 있다.


수확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오래도록 사람을 살리는 맛이 있다.


이제 나는,
다시 흙을 딛고
다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방향을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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