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자 엄마 Jan 26. 2024

폴 발레리와 메타 인지


‘메타 인지’란 내가 보고 듣고 아는 '인지'보다 한 단계 상위 레벨, 즉 '인지의 인지'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를 인지하는 것이다. 타인이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를 인지하는 것도 역시 ‘메타 인지’다. 생각하는 힘, 이해하는 힘의 기초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불리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가 있다. 「해변의 묘지」, 「젊은 파르크」 등 시 작품뿐 아니라 시학, 예술, 철학, 수학, 건축, 현대문명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산문도 썼다. 그의 작품들 속 일관된 주제는 ‘정신과 사유의 힘’이다.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젊은 파르크」는 시 쓰는 주체, 시인의 메타 인지 과정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나는 구불구불한 나를 보는 나를 보고 있었고, 또 내 깊숙한 숲들을 샅샅이 금빛으로 칠하고 있었다. (「젊은 파르크」, 35-36행)" 청년기에 쓴 산문 「테스트 씨」에서는 "나는 있으면서 자신을 보는 나를 보는 존재이며, 그다음도 이와 같다."라고 피 말리는 자기 응시 끝판왕을 제시했다. 발레리는 테스트 씨를 가리켜 "그는 가능성의 악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정했다.      


폴 발레리는 왜 나를 바라보는 걸까?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영역을 탐사하고 싶어서이다. 이건 실용적인 일이 아니다. 꼭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메타 인지를 무의식적으로 연습한다. 습관적으로 훈련한다. 최근의 뇌과학이 밝히듯이 인간의 뇌구조 자체가 이런 일을 필연적으로 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 일도 새삼스런 일도 아닐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은 ‘정신과 사유의 힘’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의 시를 잘 모르는 사람도 「해변의 묘지」의 한 시구를 잘 알고 있다. "바람이 일어선다. 살아야겠다."  이 시구는 난해한 시 전체를 교과서 속 낡고 고고한 자리가 아니라 대중 속에서 인기를 끄는 작품으로 자리 바꿈 시킨다. 수년 전 국내 지상파 방송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킬미 힐미」에서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지성이 이 시구를 읊조리기도 했다.  「해변의 묘지」, 「젊은 파르크」, 모두 읽기 곤란한 시들이다. 난해하고 난해하다. 그런데 시라는 게 그렇다. 독자는 시의 한 문장, 한 구절에 꽂히면 그 전체에 굴복한다. 발레리의 시만큼 이런 현상이 극명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발레리 시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입에 감기고 귀에 꽂히는 한 두 문장 때문일까? 아니다.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져 들어가는 듯한 발레리 시의 종장은 항상 삶의 찬가가 치고 올라온다. 찬란하다. 벅찬 생명의 의지, 삶을 끌어안는 열기가 가득하다. 기나긴 메타 인지 과정을 거쳐 폭발하는 열기이다. 삭막하고 고단한 사유의 사막을 한 걸음 한 걸음 건너서 뜨거운 삶의 한복판에 당도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발레리 시의 대중적 인기 요인이 있다.  발레리 시를 지적인 시도 아니고 상징주의 시도 아니게 만드는 요인이다.  

    

폴 발레리의 메타 인지 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 보자. 한 개인의 지독한 고행은 모든 개인들의 고행이기도 하다. 유형화되지 않고 획일화되지 않는 개인들, 차이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삶의 찬가로 귀결되는 고행에 다 함께 공감한다.       


최근 들어 ‘메타 인지’는 교육, 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굳이 발레리식 고행이라고 엄살떨 것도 없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메타 인지를 가지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된다나.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생각, 무엇인가를 더 알고자 하는 생각은 좌절보다 흥미를 유발한다고 한다. 뇌는 더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주체 나는 더욱 의식적으로 호기심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최근의 메타 인지 열풍은 필시 아이들의 학습능력을 높이려고 사고 훈련을 시키는 데에서 오는 것 같다. 실용적 목적이다. 하지만 발레리는 성공하기 위해 성적을 높이기 위해 사유한 게 아니다. 나를 알기 위해, 삶을 알기 위해 메타 인지를 극대화했다. 성장과 발전의 수명이 끝난 유한한 서구 문명을 직면하는 행위였다. 결과적으로 발레리는 비실용적인 시적 언어를 완성의 경지로 구사했고, 아주 실용적이면서 관료적인 산문 언어도 빼어나게 구사했다. 문학을 다시 한번 갱신시켜 주었다. 메타 인지력은 이래저래 삶을 적극적으로 살게끔 이끄는 동인이다.       


도서 「생각법이 달라지는 스탠퍼드 교육법」은 AI 시대를 살아야 할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철학 사고’에서 ‘메타 인지’를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메타 인지력은 21세기를 헤쳐나가야 할 하나의 필수 도구로 부상했다. 이젠 AI의 지능을 주도하거나 AI의 지능과 협업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사유능력이 됐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건 '생각하는 힘'이다.  


                    

작가의 이전글 해주오씨 시조단과 찬란한 과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