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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Jan 26. 2024

폴 발레리와 '자기 응시•자기 청취’

청년 발레리는 정서적 위기를 겪는다. 감정의 혼란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본다. 문학의 시대에 문을 닫는 계기가 된다. 1892년 제노바의 위기이다. 이후 발레리는 자아에 대한 기나긴 명상의 시대로 들어간다.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청년 발레리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노트에 기록하며 공부한다. 평생에 걸쳐 이 작업을 계속한다. 생각한 것을 객관화하는 작업이다. 이 객관화는 현실과는 또 다른 제2의 삶을 향한 것이다. 청년 발레리에게, 감각 세계의 강렬함은 지성의 자유로운 기능을 방해한다. 그렇다고 감각 세계를 피하는 게 아니다. 그는 '감각의 신비주의자'가 존재한다고 여기며 그 자신도 일종의 신비주의자가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제2의 삶을 만들기 위한 거리두기 전략이 나온다. 객관성을 향한 도피가 청년 발레리의 주요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선 잡기로 나타난다. "나는 하나의 시선이 되었지 Je m’étais fait un regard." 프랑스어의 대명동사 se faire를 사용한 문장이다. 직역하면 "나는 내게 하나의 시선을 만들었지"이다.     


그런데 앙드레 지드와 가스통 갈리마르가 시를 써내라고 끈질기게 채근한다. 공책에 담아둔 옛 시들을 꺼내어 출판을 위한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걸 출판하느니 새로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쓰기 시작한다. 시는 찬가(讚歌)이다. 발레리는 오랜 자기 응시의 작업을 거쳐 노래하는 작업으로 이행한다.  자기 응시와 자기 청취가 협연하는 글 쓰는 검객의 자리에 선다. 발레리 노트의 ‘글래디에이터’ 항목은 글 쓰는 노동자에 대한 아포리즘이 가득 담겨있다. 시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1917년이다. 그 유명한 「젊은 파르크」와 함께. 46세의 나이이다. 512행의 장시, 대작이 탄생한 것이다.       


글래디에이터는 남에게 보여주는 싸움을 한다. 대중의 환호에 노출된다. 무림 고수가 아니다. 발레리가 저주받은 시인들의 계보에 있지 않고 사회적 시인의 위상으로 이동한 요인이 여기에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급여 생활자 같은 시인의 모습이 발레리에게 있다. 내면은 검투사인 상식인 말이다.     


발레리의 자기 응시는 객관화 과정을 벗어나 자기 청취의 주관화 과정을 향한다. 발레리 시에는 ‘자기 응시’와 ‘자기 청취’의 다채로운 주제들이 담겨있다. 그 시적 주제와 이미지들을 따라가는 일은 흥미롭다. 발레리 식 감각 훈련에 동참하면서 감각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발레리를 ‘행복의 시인’으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든다.      


발레리식 자기 응시와 자기 청취는 난해할까?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순진한 아이에게 귀를 기울이고, 우리 안에서 언제나 처음처럼 보기를 원하는 아이를 억압하지 않으면 된다. 참 쉽다. 이 쉬운 일을 우리는 잘하지 않는다. 폴 발레리의 철학 산문 「인간과 조개껍질」을 보자. 바닷가를 거닐다 파도에 밀려온 조개껍질 하나를 주운 인간은 그 조개껍질을 응시하다가 ‘만든다’는 것에 대해 성찰한다. ‘만든다’는 것에 대해 ‘사유’하고 ‘설명’하기, 결국 ‘이 문제는 음악과 시의 훌륭한 작품을 만든 것이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자연의 우연인가? 인간의 제작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젊은 파르크」를 발표한 후의 여정은 잘 알려져 있듯이 「해변의 묘지」가 담긴 『매혹』을 세상에 내놓고, 청년기 시들을 개작한 『옛 시 앨범』도 출간한다. 그리곤 다시 시를 쓰지 않는다. 관료적인 산문가의 활동을 장중하게 펼친다. 유럽의 지성인,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의 산문들은 그의 시 못지않게 자기 응시와 자기 청취 습관을 오롯이 담고 있다. 대부분의 산문 역시 시처럼 외부의 의뢰와 요청에 따라 생산한 결과물이었다. 발레리가 평생 한 일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만든다.”고 발레리는 말했다.      


지금은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평가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발레리식 자기 응시•자기 청취로 내 정신의 힘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바람이 일어선다!…… 살아야겠다!”        


“하늘은 노래한다 기진맥진한 영혼에게

바다 기슭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변하는 것을   

  

아름다운 하늘, 진정한 하늘이여, 보라 변화하는 나를!

그토록 큰 긍지 후에, 그토록 큰 기이한

그러나 힘에 가득 찬 나태 후에,

난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던지네”

(「해변의 묘지」 29-34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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