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연구기관에서 일하던 때였다. 나는 현대미술에 몰두했고 전시 현장이 좋았지만 이 예술 세계는 정신분열증에 빠진 것 같다고 종종 느꼈다. 하지만 감자와 현대미술 전시회를 다니면 마냥 좋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몸과 맘을 맡기면 됐으니까. 전시 현장은 예술품 과시 장소도 아니었고 놀이 세상일 뿐이었다. 엄마와 아기가 손잡고 걷는 산책 장소였다.
2000년! 밀레니엄의 시작이라며 온 세상이 갖은 요란을 다 떨던 해였다. 그때 호암 갤러리와 로댕 갤러리에서는 《백남준의 세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개관 때 일한 적이 있는 로댕 갤러리를 가는 건 쉬웠다. 당시엔 집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고, 감자와 손잡고 나들이하는 거였으니까. “피아노가 왜 이래?” 백남준의 해체된 피아노를 본 여섯 살 감자의 감상평이었다. “피아노가 왜 이래?”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나도 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 전시품으로 옮겨가면 됐다. 해체된 피아노 외에 무슨 작품들을 보았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 (Jacob's ladder, 2000)〉는 잊을 수 없다.
〈야곱의 사다리〉는 〈감미로움과 숭고함 (Sweet and Sublime, 2000)〉이란 제목을 가진 설치 작품과 합체된 전시 디자인으로 로댕갤러리 전시장 도입부를 장엄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시장의 하이라이트였다.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서 화려하게 첫 선을 보인 작품을 로댕갤러리에 맞게 재설치한 따끈따끈한 신작이었다. 흥미롭기도 하고 또 연구할 만한 풍부한 문맥을 내포한 작품이었다. 작품 앞에는 등받이 없는 긴 의자가 있었다. 갑자기 감자가 "여기에 좀 앉아있자"라고 했다. 난 대단히 놀랐다. 마치 어린아이가 예술적 영감에 감동받아 더 감상하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들렸거든. 예술이란 것엔 백지상태인 어린아이를 매혹시키는 그런 본질적인 위력을 지닌 작품인가? 아니면 이 아이의 예술적 감성이 수준급인가? 내 딸이 천재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아마도 아이는 그저 다리가 아팠을 거다. 무심히 앉아있고 싶어 한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 작품과 그 전시 장소는 모녀가 서로 소중히 여기기 위한 TPO(Time·Place·Opportunity, 시간‧장소‧기회)가 절묘하게 맞았다. 신(神), 사다리, 야곱이라는 지상의 인간, 이들이 한 자리에 있는 TPO 말이다. 나와 감자, 그리고 부모님, 신, 우주, 그런 것이 함께 있었다. 말 그대로 달콤하고(Sweet), 숭고(Sublime) 했다. 감자와 함께 나란히 〈야곱의 사다리〉 앞 의자에 앉아 있던 그 시간,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화려한 레이저 아트 작품을 앞에 두고 어깨가 딱 벌어진 통통한 작은 여자아이가 다부지게 앉아 있는 그 뒷모습은 어이없을 정도로 든든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장엄하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과장된 의미 부여를 하는 내가 우습고, 백남준이라는 거장의 대형 작품이 품는 아우라가 장엄하다.
백남준은 이렇게 감자와 나의 끈끈한 유대감을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용인에 이주한 후 백남준아트센터에 가끔 들렸다. 근사했다. 2008년에 개관한 이 건축물은 독일의 건축가 키르스텐 쉐멜(Kirsten Shemel)의 디자인이 채택된 곳이다. 그랜드 피아노의 형상을 재현한 건축 디자인이다. 아트센터 외벽 주변을 산책하면 피아노 형상을 느낄 수 있다. “피아노가 왜 이래!”라고 하던 어린 감자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내부 전시 공간은 일단 어둡다. 어둠 속에 텔레비전 모니터 화면들이 춤춘다. 영령이 사는 집이라고 칭해도 어울릴 만한 공간이다. 내가 현대미술 전시장을 정신분열증 무대같이 느끼는 건 당연하기도 하다. 현대인의 복잡한 감각과 의식을 어둠 속에서 재현하고 극복하는 공간이니까 말이다. 그곳에 가면 60~70년대 청년 백남준과 전위 예술가들의 흔적이 반갑고, 백남준의 후예들인 젊은 미디어 예술가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10 ☎ 031-201-8500 www.njp.ggcf.kr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을 전시하고 미디어를 연구하기 위해 2008년 경기도가 설립한 백남준 아트센터는 백남준 자신이 생전에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고 직접 이름 지었다. 자신의 업적을 추앙하는 공간이 아니라 백남준의 실험적인 예술정신을 계승하는 다양한 작가를 위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전시공간에는 백남준의 〈TV 정원〉, 〈TV 부처〉, 〈과달카날 레퀴엠〉, 〈로봇 K-456〉 등 비디오 아트 작품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