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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Feb 13. 2024

폴 발레리와 여성적 자아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시에는 여성적 자아가 우글거린다. 1917년에 출간한 그 유명한 「젊은 파르크 La Jeune Parque」는 512행에 걸쳐 한 여자의 의식 변화를 노래한 시이다. 청년기의 시들을 개작해 1926년에 출간한 『옛 시 앨범 Album ce vers anciens』을 보자. 잠에 빠져드는 소녀, 잠자는 공주, 실 잣는 여자, 물에 잠긴 여자, 공허한 무용수 등 무수한 여성적 자아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파르크의 씨앗들이나 다름없다.       


폴 발레리는 시를 창조물이 아닌 구성물로 여겼다. 뮤즈의 영감으로 생기는 시가 아니라 장인이 제작하고 건축하는 시를 원했다. 발레리는 어떻게 파르크를 축조했을까.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처럼 이상형의 조각품을 빚은 것일까? 아니다. 발레리는 이상미(理想美)라는 것엔 등 돌린 근대 작가이다. 파르크라는 의식(意識)의 파편들을 『옛 시 앨범』의 여성적 자아에서 찾아보자.      


폴 발레리의 주요 주제인 자아 탐구는 타자성과 타자의 현존을 중시한다. 그 타자는 집요하게 여성성의 모습을 갖는다. 여성적 자아들을 둘러싼 시청각 행위에는 발레리 여성성의 여러 양상이 드러난다. 감은 눈, 황혼을 배경으로 해체된 몸, 물결 소리 같은 흐릿한 소음, 중얼거림, 노래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잠든 여자’는 발레리 여성적 자아 중 주요 특징을 이룬다.      


수면의 시     

죽음이나 꿈에 홀려 있는 여자는 무기력의 온갖 징후들을 담고 있다. 능가할 수 없는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또는 찬란한 밤으로 마비시키는 수면의 가장자리에서, 죽음에 다름 아닌 정체성의 상실 가까이에 있다. 이는 고통스럽지만 감미로운 자기 인식의 유형을 이룬다. ‘잠들기’는 죽음의 외관 아래 나와 세계를 융합하는 가장 훌륭한 침잠의 모델이고, 인간 운명의 완전한 수락이기 때문이다.       

빨려 들어가는 듯 오수에 잠기는 「실 잣는 여자 La fileuse」의 모습도 그 한 예이다. 실 잣는 여자는 조용하게 흐르는 지속성, 시간 속에 스러지듯 안긴다.  「여름 Eté」에서 여자 아이를 볼까. 이 어린 여자는 구멍 숭숭 뚫린 수면(poreux sommeil), 즉 외부에 열려 있는 내면의 수면 속에 잠긴다.  「잠자는 숲 Au bois dormant」의 공주는 어떤가. 감은 두 눈(yeux ensevelis), 뺨(joue)이라는 형상만 있는 여자이다.         


상승의 시     

그런데  『옛 시 앨범』 마지막에 배치된 「세미라미스의 노래 Air de Sémiramis」를 보라. 촌스러울 정도로 힘차다. 방패와 창, 칼로 무장한 서유럽의 여신 조각상을 보는 것 같다. 세미라미스는 40여 년 이상 재위하며 도시, 도로, 하수도 공사 등 대대적인 건설 공사를 벌였다는 앗시리아의 여왕이다. 공학기술의 정수를 모은 건축물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바벨론의 공중정원도 세미라미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상의 이야기라지만 세미라미스가 만능(萬能)의 여성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정체성이 제거된 ‘잠든 여자’ 시편들의 여성적 자아와는 달리 대단히 구체적이고 강력하다.      


- 나는 대답한다!... 나는 내 깊은 부재에서 솟아오른다!

내 마음은 내 잠이 스치던 죽은 이들로부터 나를 빼앗아,

힘 폭발하는 큰 독수리인양, 내 목표 쪽으로,

나를 실어가네!... 나는 해를 마중하러 날아간다! (「세미라미스의 노래」, 25-28행)     


올라가라, 오 세미라미스, 나선탑의 여주인아

사랑 없는 마음으로 유일무이한 명예 향해 돌진하는 그대여!

네 황제다운 눈은 대제국을 갈망하네

네 단단한 왕홀은 대제국을 행복에 물들게 하리...  (「세미라미스의 노래」, 33-36행)


이 시에서 ‘큰 독수리 grand aigle’, ‘태양 soleil’은 강렬한 상승 시선의 이미지들이다. 부재의 자아, 수면에 잠긴 자아를 행위로 이끄는 시선의 행위를 은유한다. 잠에서 깨우는 매개체인 것이다. 태양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하늘의 큰 눈이기도 한 ‘태양’ 덕분에 최대한의 강력한 자유를 즐기고 창조적 힘을 구사한다.  청년 발레리의 내면적 여성성은 삶이라는 ‘힘찬 낙원’을 향하는 여자, ‘아침 빛’을 느끼며 곧 다가올 태양을 향하는 역동적인 파르크를 세미라미스의 마력(魔力) 속에 잉태하고 있다.      


삶은 양성적 구성물      

폴 발레리 시의 여성적 자아들은 단순히 여성이 아니다. 그들은 세계와 만나는 주체일 뿐이다. 자기 내면과 만나는 분열된 주체이다. 기존의 시적 정체성이 제거된 자아, 서사가 해체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폴 발레리는 만들어 가고 있었다. 


『옛 시 앨범』의 다양한 여성적 자아들은 하룻밤 동안 잠 속으로 빠져들고 깨어나는 파르크의 의식 속 변화의 흐름을 예고한다.  수면과 상승, 즉 잠들기와 깨어남은 이 여성적 자아들의 두 양태이다. 우리 인간의 삶, 그 순환고리가 잠들기와 깨어남 안에 압축돼 있다.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잘 자고 잘 깨어나야 한다.      


폴 발레리의 명상은 그의 여성적 자아들이 그러하듯 삶을 향한다. 삶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창조’가 아니다. 기나긴 ‘구성’이다. 발레리의 여성적 자아들은 이 지루한 구성 과정의 단상(斷想)들을 보여준다.  「젊은 파르크」가 ‘여자의 시’라면 「해변의 묘지」는 ‘남자의 시’라고도 한다. 「해변의 묘지」의 그 유명한 시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떠올려보자. 프랑스어 원문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을 직역하면 “바람이 일어선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이다. 일어서서 시도하는 것, 그것이 삶의 시작이다.      


「세미라미스의 노래」 마지막 행은 “현자 세미라미스, 여주술사 그리고 왕”이다. 남성명사 ‘왕(roi)’으로 끝나는 여왕! 폴 발레리의 여성적 자아들은 양성을 향한다. 자웅동체의 양성이 아니라 합일로서의 양성이다. 폴 발레리에게 삶은 양성적 구성물이었다. 그리고 시(詩)는 양성으로 구축된 건축물에 다름 아니었다. 인생이 남녀 각자가 아닌 남녀 양성이 함께 구축하는 구축물인 것과 같다.    


                                                        Tornata의 화가가 그린 세미라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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