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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Feb 19. 2024

폴 발레리와 압록강(Le Yalou)


압록강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강이다. 803㎞에 달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그런데 총 유역면적(64,739㎢)의 절반 가량(32,182㎢)은 중국 만주 등에 위치한다. 우리나라의 강이자 중국의 강인 셈이다. 1895년 9월, 폴 발레리(1871-1945)는 이 압록강을 가상공간 삼아 산문 『압록강 (Le Yalou)』을 썼다. 청국의 노학자와 유럽의 청년이 강가에서 만난다. “1895년 9월, 중국, 파랗고 흰 날이었다. 그 학자는 나를 해안 모래 위 검은 나무로 만든 등대로 안내했다.” 

  

유한한 유럽문명을 직시하는 유럽의 청년 ‘나’, 동양을 지키는 청국의 현자, 두 인물은 압록강을 무대로 성찰한다. 이 산문의 주제는 야만을 드러낸 유럽문명에 대한 성찰, 동양의 꺼지지 않을 저력에 대한 숭모(崇慕)이다. 그러나 서구식 오리엔탈리즘을 담은 산문이 아니다. 폴 발레리의 글이 그렇듯 지극히 객관적이다. 동서양 문명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숙명, 죽음과 삶, 소멸과 불멸을 노래한다. 


청국의 학자만이 말하고 진단한다. 유럽의 청년 ‘나’는 오로지 바다를 관조하고 바다를 명상할 뿐이다. 그러니까 바다가 주인공인 산문이다. 바다는 그 모든 현실적 통찰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거대한 자연으로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삼키면서 다시 태어나게 할 자연으로 말이다. 이 산문은 경험도 이성적 판단도 작동하지 않는 수많은 위기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 태양과 평화롭게 현존하는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게 한다.   


그 바다는 압록강이라는 동양의 대하(大河)를 담고 있다. 그 바다는 발레리의 영원한 모태이자 고향인 남 프랑스 세트의 해변에서 관조하는 지중해 바다와 다르지 않다. 자연이자 섭리로서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욕망이 쌓아 올린 유럽 문명은 바다에 담긴 파도 또는 물거품과도  같다.


불멸의 삶     

산문 속 청국 현자의 문명 진단은 2024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나’에게 오히려 동양을 되돌아보게 한다. 서구문명의 병적 증후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나는 청해(靑海) 가까이 있는 청국(淸國)의 학자입니다. (...) 여기 사는 우리들은 태고 시대부터 끊이지 않는 한 가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천수만 사이에서 서로를 자식이고 아버지라고 느끼고 있지요. (...) 각자가 그 자리를 지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부유한 땅을 잃고 선조들의 경탄할 만한 건설을 떠나서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 제국은 산 자와 죽은 자와 자연으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의 제국은 모든 것을 조화시키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역사와 연결돼 있지요. 어떤 꽃, 흘러가는 시간의 부드러움, 햇빛에 반쯤 열린 호수의 부드러운 살결, 감동적인 일식...... 이런 것들 위에 선조의 정신과 우리의 정신이 만납니다. 그것들은 다시 태어나고, 우리는 조상이 이런 것들에 이름을 주었던 그 울림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면 추억이 우리를 조상에 연결시켜 우리에게 불멸의 삶을 줍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무한히 증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항상 확장될 수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소요를 일으켜 스스로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만약 정체한다면 퇴폐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 우리는 사람을 잡아먹는 지식에의 도취를 피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낡은 답변, 우리의 신들, 우리의 힘의 단계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 이제 당신은 알 것입니다. 왜 우리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저녁에 불꽃놀이를 하기 위해 화약을 발명했으니까 말입니다.”     

당신들은 그저 어린아이 일 뿐이요     


“당신들은 그저 어린아이 일 뿐이요.”

“나는 유럽의 미친듯한 무질서를 바라보며 놀랐다오. 나는 그런 혼란의 지속조차 이해할 수 없소, 당신들은 기나긴 생명이 짜는 인내심이 없어요. 불규칙성의 감정, 어떤 사물을 가장 완벽한 장소에 놓는 감각, 통치의 지식, 이런 것이 없습니다. 첫째 날의 일을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며 당신들은 고갈되고 있어요. 당신들 조상은 그렇게 두 번 죽었고, 당신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스스로 뿌리를 뽑고 자신들의 꽃을 시들게 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앞으로 생존할 것인가요? 어떻게 앞으로 길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요?”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당신들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한 것을 모릅니다. 당신들은 광기처럼 직접적인 것을 찾고, 동시에 당신네들 조상과 자손을 파괴합니다.”      


산문의 배경이 되는 1895년 9월, 청국은 이미 일본에 패배한 후였다.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년 7월~1895년 4월)을 복기해 보자. 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 조선의 운명은 정말 참담했다. 발레리는 현대문명론을 담은 산문집 『현대세계의 고찰』 서문에서 청일전쟁 당시 중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행동을 ‘유럽풍으로 개조되고 장비를 갖춘 아시아 국가 최초의 실력행위’로 정의했다. 일본은 이미 유럽화 된 동양이었다. 청일전쟁 후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 서구의 지배에 들어갔다. 


2024년 현재 유럽문명은 그 수명을 다하지 않고 여전히 건재한 것만 같다. 대한민국은 서구보다 더 서구화된 너무도 서구적인 사회가 됐다. 전 지구촌의 유럽 문화권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은 그 대표적인 모범 사례일까? ‘만화경’ 같은 사회다. “지금까지 부동의 모습이라고 믿어 온 요소들을 연이어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면서 다른 모습을 구성하는 사회” 말이다. 하지만 청일전쟁 당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살벌한 시대인 지금, 대한민국은 국제정세에 속수무책 말려드는 강대국들의 호구는 아니다. 사유하는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 어린아이가 아니다.  중국 역시 청국 시대의 중국이 아니다. 잠에서 깨어난 용(龍)인 듯 세계를 휘젓고 있다. 


바다그 치솟는 생명력      


대한민국에 사는 '나'의 눈엔 야만적인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이런 아름다운 산문을 쓰는 유럽 청년의 상황이 어이없다. 삶의 아이러니다. 제국주의의 무지막지한 침략과 전쟁 속에서 어느 누군들 답이 있으랴. 바다를 향해 삶의 의지를 다지는 젊음을, 그 치솟는 생명력을 어느 곳 어느 시대에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럽 청년 ‘나’의 바다 관조로 시작하는 이 산문은  ‘나’와 바다와의 합일로 마무리된다. 폴 발레리는 압록강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를 흐르고 있다는 팩트를 몰랐을 것이다. 그저 '얄루 리버(Yalou River)'라는 독특한 이름에 홀렸을 것이다. 뭔가에 홀리듯이 ‘나’와 바다의 합일로 마무리되는 이 산문은 동서양이 공동 운명체로 합일될 수 있는 경지를 꿈꾸게 한다. 그 어느 편의 판단도, 정복 욕구도 무가치하게 만드는 초월적인 합일 말이다. 눈앞에 있는 바다를 헤엄치는, 바다 위로 헤엄치는 주술적인 상상력으로 말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찬란한 바다, 건너편 눈앞에 바쳐진 금빛 리큐르의 작은 컵 정도로만 보인다. 눈을 감는다. 움직이는 물소리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바다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위대한 인내심으로 채우는 것이 즐겁기 그지없었다.”


“다시 한번 눈을 뜨자. 확고한 날(日) 아래로 돌아가자. 여기서는 되는 대로 맡겨두기로 하자. 자, 다 보인다. 파도는 넘실넘실, 나도 꿈틀거린다. 파도는 속삭이고 나는 말한다. (...) 나는 다시 살아나고, 아득한 저 멀리, 외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나를 소생시키는 희미한 첫 번째 소리 속에 힘이 내게 되살아난다. 파도를 향해 헤엄친다—아니, 파도 위를 헤엄친다—그것은 같은 것이다. 물속에 내리면, 다시는 흐트러지고, 마음은 앞서가고, 눈은 무게도 없이 녹아버린다... 그때, 한 개인은 자신과 눈 아래를 지나가는 그 물의 결합을, 그 깊은 결합을 강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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