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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Apr 12. 2024

폴 발레리와 천사

  


천사의 주제는 폴 발레리(1871-1945)를 평생 따라다녔다. 산문시 「천사 (L’Ange)」는 발레리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된다. 텍스트에는 1945년 5월로 날짜가 표기되어 있다.   


이 산문시는 한 남자가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눈물짓는 모습을 묘사했다. 데자뷔(déjà-vu), 기시감(旣視感)이 온다. 바로 나르시스 신화 속 ‘나르시스’이다. 그러나 발레리의 천사는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면서 죽어가는 신화 속 나르시스가 아니다. 이 천사는 자신을 지성의 존재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은 감상에 빠져 울고 있는 인간임을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지성 추구를 중단하지 않는다.    

   

어떤 천사가 샘물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샘물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며, 자신이 인간임을 보고,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끝없는 슬픔의 먹이가 된 이 자가 물결 속에 떠 있는 것에 더없이 놀라고 있었다.... 바로 자기 것인 형상과 거기 그려진 고통이 그에게는 아주 낯설었다. 그토록 비참한 겉모습이 그의 놀랍도록 순수한 정신의 본질을 부질없이 괴롭히고 캐묻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오 나의 불행이여, 넌 내게 무엇이니? /.../ 

그리고 그는 영원히 인식하기를 또 이해하지 못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연배를 초월해 절친한 사이였던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1834~1917)는 발레리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드가는 발레리가 “천사의 눈을 가졌다”라고 말하곤 했다. 독일의 작가이자 평론가,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은 발레리의 “깊이 파인 눈들은 그가 지상의 이미지들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음을 암시해 준다”라고 했다. 실제로 발레리에게서 ‘천사적 자아’의 탐구는 청년 시절부터 평생 쓴 새벽 공책, 「카이에 Cahiers」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발레리 스스로도 자신의 청년기 모습을 ‘그리스도를 떼어낸 천사‘’라고 정의했다.      


너 네가 천사이던 시절이 생각나니? 생각 나. 그리스도를 떼어낸 천사. 의지적 시선에 관한 일이었지. 나의 두 눈으로 모든 것을 섭렵하려던 생각, 결국 아무것도 내 시선에, 내 시선의 욕구에 저항하지 못하리라고 믿었지.     

아니 누군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나 자신은 그에 대한 명확하고 절대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믿었지. 모든 것이 내게 너무 단순해 보여서 문학이 불가능해졌어. 더 이상 대상이 없었지. 어떤 그런대로 실행된 시는 모든 단어들을 파괴하고 연소시켰어. 이 단어들은 모든 고유한 힘을 상실했고, 그리고 당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인간들의 열쇠일 뿐이었어. 자아는 나 자신의 몸짓으로나 우연히 아무 용어로나 말해질 뿐이야.”      


발레리에게 ’ 천사‘는 의지적 시선, 명석한 지성, 자기 고립, 초월적 자아를 상징했다. 천사의 시선은 “나의 두 눈으로 모든 것을 섭렵”하는 게 목표였다. 문학을 거부한 청년 발레리는 이런 천사의 시선을 내면의 전략으로 삼는다.      


시선 천사       

천사 모티프는 『옛시 앨범』의 「저녁의 확산 (Profusion du soir)」에서 천사의 승리와 천사의 실패로도 그려진다. 이 시는 「내던진 시...」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포기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황혼의 바다를 배경으로 바라보는 주체 나의  정신 기능이 16연 97행에 걸쳐 여러 단계로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저녁의 확산」은 4연의 ‘벗은 눈의 신선한 천사’와 10연의 ‘헤엄치는 천사’가 펼침의 열쇠 역할을 한다.      


「저녁의 확산」은 '바라보는 눈'에 대한 찬가이다.  바라보는 주체 나의 시선에 반영된 황혼 빛의 범람에 대한 온갖 변주를 담았다. 이 시의 수많은 원고에서도 거의 불변항이던 4연의 ‘벗은 눈의 신선한 천사 l'Ange frais de l’oeil nu’는 눈 이미지에 통합된 천사의 순수 시선을 암시한다. 극도로 명석한 그 눈은 자기가 보는 모든 것을 정신의 먹이로 변형시킨다. 발레리는 시선 천사의 이런 명석성을 갖고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 나아가서는 세계를 분석하고 관찰했다. 


벗은 눈의 신선한 천사는 제 정숙함 속에서 예감하네,

명석하게 밝혀진 별의 숭고한 탄생,

금강석 하나가 광채를 토닥이며 움직일 것을... (「저녁의 확산」 4연)      


시선 천사는 발레리가 애호하는 비범한 눈이다. ‘벗은 눈 (oeil nu)’은 사물의 물질성을 역동적으로 포착하는 순수 시선과도 다르지 않다.  이미 알고 있는 의미를 가진 대상이 아니라 진정성을 드러내는 사물을 발견하는 순수 시선이다.    


헤엄치는 천사     

‘헤엄치는 천사’는 저녁의 확산 10연에 등장해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은유한다. ‘한 천사가 헤엄치네.(Un ange nage.)’라는 문장 안에 프랑스어 ange와 nage의 애니그램(anagramme 철자 바꾸기)을 구사하며 주체 나와 세계의 완벽한 합일을 보여준다. 헤엄을 통해 발레리는 천사-몸의 주제를 시도한다. 여기서 몸은 정신에 지배되는 수동적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몸이 동원된 사유, 즉 몸으로 화한 정신의 기능을 헤엄치는 천사를 통해 예고한다. 천사-시선에서 천사-몸으로의 변화는 시선에서 시작된 시적 창조가 완전한 몸, 총체적 몸, 참몸을 구현하기 위해서 몸의 주제로 옮겨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저녁 공기의 바위들 위에서는

어느 신성이 팔꿈치를 괸다. 한 천사가 헤엄 친다.

천사는 허리를 돌릴 때마다 공간을 차지하네.

나, 한 사람의 그림자를 이승에 던지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주권자로서 풀려난 나는,

나를 담그는 나, 나를 경멸하는 순수한 나를 깨닫고!

미래의 품에서 바다의 추억을 되살리며,

내 시선 속 내가 택한 몸은 전부 물에 잠기네 (「저녁의 확산」 10연)     


물에 몸을 던지는 것은 시선이 섭렵하는 세계에 온몸이 잠겨 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새벽빛에 깨어나 자아를 완전하게 소유하고자 하는 세미라미스의 힘찬 움직임이 ‘헤엄치는 자(nageur)’에 비유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헤엄치는 천사는 육체의 힘과 동시에 사유의 힘이 극대화된 경지이다. 이럴 때 발레리의 천사는 글 쓰는 글래디에이터, 춤추는 무용수, 건설하는 건축가와 다르지 않다.       


난 내게 헤엄치는 자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는 모든 견고함에서 벗어나, 물의 충만 속에 자유롭게 풀려나, 장애물 없는 한 복판에서 자기 힘의 형태와 그 한계의 감정을 얻는 자였어. 그 분명한 힘의 매듭에서 확장의 극단에까지 말이다. 

(침묵기에) 내 사유의 삶의 이상은 그 행위와 노력을 다시 느끼는 것 그런 것 같았어. 그 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건과 한계를 인식할 수 있기까지 말이야.      

나는 만드는 힘만 원했지 세상 속에서 그 힘을 단련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어.”


하지만 비인간적인 완벽한 명석성을 추구하는 천사적 열망은 현실에서는 존속할 수 없다. 「저녁의 확산」에서도 황혼이 세상을 뒤덮어 어두운 밤이 오면 천사가 도약했던 무대는 막을 내린다. 이 시는 감은 두 눈을 향한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이때 주체 나에게는 모성이 싹트고 있다. 모성은 지칠 줄 모르는 사유이다. 포기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유이다.      


닫혀라! 닫혀라! 모욕당한 창들아!

진짜 밤을 두려워하는 커다란 눈들아!

너, 신비와 권태로 잉태된 너는 

별들이 씨 뿌려진 이 높은 하늘에서 받아들여라

사유의 말없는 모성을...     


감은 눈으로만 남은 주체 나. 그러나 발레리 자신이 최후의 산문시 「천사」에서 드러냈듯이 “평생 ‘인식하기’를 또 ‘이해하지 못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천사의 모습과 겹쳐진다. 만드는 힘만을 원한 천사적 자아, 창작의 산물이 아니라 그 과정만을 원한 청년 발레리는 문학 창작을 단념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 46세인 1917년 「젊은 파르크」를 낳는다. 「내던진 시...」라는 부제가 붙은 「저녁의 확산」 역시 1926년판 『옛시 앨범』에 그 완성본이 나타난다. 사유의 말없는 모성은 포기하지 않고 문학을 잉태한다. 


1926년판 『옛시 앨범』에 처음 발표된「저녁의 확산」은 1899년 경에 첫 원고본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성의 시인으로 알려진 발레리의 작품 중에서도 처음 등장한 ‘지성의 시’로 꼽힌다. 지성의 인간이 주체로 전면 등장하는 시인 점에서 「해변의 묘지」나 「젊은 파르크」를 예고한다. ‘바다’를 무대로 한 ‘밤’의 ‘독백’인 점에서는 「젊은 파르크」와 유사하다. 그러나 「저녁의 확산」 속 ‘나’는 「젊은 파르크」 속 의문을 던지며 괴로워하는 여자가 아니다. 왕성한 호기심으로 어두워지는 세계를 섭렵하는 한 인간이다. 평생 '천사'라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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