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인의 주식은 쌀국수다. 그런데 이 음식은 베트남 전통요리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베트남에 등장한 새로운 요리다. 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소비하던 베트남에 소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프랑스인의 음식 습관이 영향을 주어 쇠고기 육수나 바게트(반미) 같은 요소가 베트남 음식에 스며든 것이다.
1880년대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면서 이 시기에 소고기 뼈와 고기로 국물을 우려내는 조리법이 전파되었고, 여기에 쌀국수면(분, bun)을 넣어 먹으면서 퍼(pho, 쌀국수)가 탄생했다. 퍼는 베트남 전쟁(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 1960~1975) 이후 베트남인들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미국, 프랑스, 호주 등으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세계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도 쌀국수는 시그니처 음식이다. 쌀국수는 육수와 고명에 따라 소고기로 만든 「퍼 보(소고기 쌀국수, Pho bo)」와 닭고기로 만든 「퍼 가(닭고기 쌀국수, Pho Ga)」, 그 외에 무궁무진한 변이형들이 있다.
감자 가족은 소고기 쌀국수를 시작으로 하노이 곳곳에서 다양한 쌀국수를 맛보았다. 베트남의 3대 쌀국숫집으로 꼽히는 「퍼 텐 리쿽수 Pho 10 LyQuoc Su」는 소고기 쌀국수의 대표 맛집이다. 이곳은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베트남 국빈 방문 시 찾으면서 한국인에게 유명세를 탔다. 소박한 식당엔 테이블마다 여러 가지 소스, 고수, 라임, 베트남 고추 등이 놓여 있었다. 감자 가족은 소고기 쌀국수를 주문해 소스와 라임 등을 양껏 넣어 먹었다. 원조 퍼 보의 맑고 깊은 국물맛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가니로 국물 맛을 내는 「도가니 쌀국수」는 소 도가니를 주재료로 한 베트남 북부식 쌀국수이다.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였던 베트남 중부도시 「후에 Hue」의 다양한 요리를 한곳에서 선보이는 「네트 후에 Net Hue」 식당에서 맛보았다. 도가니, 소뼈, 양지, 우족을 장시간 고아 만든 맑고 담백한 육수에서 깊은 맛이 우러났다. 맑고 깊은 소뼈 국물과 쫀득한 도가니의 식감이 이색적이었다.
「우렁이 쌀국수」는 우렁이로 우려낸 육수에 토마토의 새콤한 맛을 가미한 시원한 쌀국수이다. 길거리에 좌판을 놓고 앉아 먹는 쌀국수 식당에서 한국식 옛 대중탕 소형의자에 앉아 맛본 진정 적나라한 스트리트 푸드였다.
「미엔 루옹」 식당의 「장어 쌀국수」도 별미였다. 장어 뼈로 우려낸 육수에 말린 장어 튀김을 고명으로 올린 이색적인 쌀국수다.
국물에 담겨 나오는 쌀국수가 아니라 구운 돼지고기와 얇은 면발의 쌀국수를 소스에 찍어 먹는 스타일도 있다. 「분짜(Bun Cha)」가 그것이다. 분짜는 하노이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1993년 하노이에 문을 연 「분짜 흐엉리엔(Bun Cha Huong Lien)」 식당에서 유래된 별칭이다. 분짜는 차가운 쌀국수, 구운 돼지고기, 새콤달콤한 느억짬(느억맘 소스), 신선한 채소와 허브가 함께 상에 오르는 음식이다.
분짜 흐엉리엔 식당은 2016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버락 오바마가 유명 셰프 앤서니 부르댕(Anthony Bourdain)과 함께 방문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오바마는 이때 분짜와 넴(베트남식 튀김만두), 하노이 맥주 한 병을 즐겼다. 오바마가 선택한 이 메뉴는 「오바마 세트」로 구성되어 지금도 판매 중이다. 식당 안에는 오바마가 식사하던 당시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다. 베트남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미국의 난폭한 역사를 정화시키는 이미지들이다.
퍼 한 그릇 속에서 식민지에 가해진 제국주의 문화, 이를 베트남화하여 세계화시키는 베트남인의 냉철한 민족성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