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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by 감자나무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하천이 하나 있는데 돈을 많이 썼나 봐. 하염없이 걷기도 좋은데 주변에 운동기구와 벤치도 두니까 강아지랑 사람이 평일에도 많더라고. 쉬는 날에 찾아가면 2-3시간은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이 카페는 소중할 수밖에 없어. 나도 모른 척 지나가려고 했는데 우리 같이 있었던 사진을 한 번 찍어서 올리면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고 또다시 공유하잖아. 그럼 나도 오늘의 사진을 찍고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다 기록하게 된단 말이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창문을 유심히 쳐다봐. 오늘도 우리 중에 누군가 이 자리에 앉아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옆자리에서 작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과 내가 찾아가면 아무도 없는 납골당에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꽃으로 정원을 만든 사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실천과 행동을 권하는 눈빛이 없어도 발길을 다시 돌리게 만드는 향기. 너도 함께 하지 않을래? 여기 테이프가 붙어 있어요.

어떤 결심을 하기에 태도에 따른 선택과 행동으로 어느 의심과 망설임도 없이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에 나는 적당히 훌륭하거나 씩씩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바람이 불어오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모래알이나 뿌리가 흔들리고 있었던 나약한 속눈썹이 내 눈 안으로 들어가고 만 것을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말라는 거지" 신호로 알아듣고 가까운 버스정류장, 지하철역으로 돌아갔던 날들을 손가락으로 세어보지 않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망설임이 이기는 순간을 느린 숨을 쉬며 기다렸던 것뿐이지.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신호를 보지 못한 것뿐이야. 얼굴을 돌려, 눈을 감아. 귀도 막아라. 평생 느끼던 것이 아니, 느끼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뿐이니 무슨 의미가 있니. 너는 평생 생각을 바꿔 먹을 수 없을 거야. 그냥 반대로 생각해.

쉽게 그치지 않던 비가 눈이 되어 소리들을 지우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핑계들과 함께 걷던 제자리걸음이 한심하게 느껴지다 결국 눈이 뜨거워질 때쯤 차가운 눈이 내 눈으로 들어와 비가 되어 저 아래로 내려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을 보고 있으면 속이 좋지 않다는 사람의 말이 버려지지 않고 구석에서 덜렁거린다. 그럼 이곳은 어때? 말을 잃고 오랫동안 쳐다보게 되는 하천, 호수, 강을 마주칠 때마다 당신은 없었다. 언젠가 같이 가자 말했지만 언제든 같이 가지 않았다. 같이 가자 말하기 전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정적을 가렸을 뿐. 말을 잃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고 싶다. 무엇을 원하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다고 말하며 엉엉 울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내가 무서워서 핑곗거리만 늘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손바닥과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고 아무 말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 어떤 사람도 나의 울음을 보고서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이야기를 들려줘. 나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로 말이야. 나는 듣고 있다고,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고, 네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표현을 내보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내게 줘. 언젠가 모든 것들에게서 다시 도망가고 싶을 때 하나씩 그 이야기를 찾을 수 있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집에서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허공에게 인정하는 거야. 나를 이끌어줄 손길을 기대해. 많은 가능성들의 문을 닫고 열쇠를 먼 곳으로 집어던져 버렸는걸. 그 순간의 나의 행동이 이렇게나 차가운 것인지 몰랐어. 어디에서나 덜렁덜렁 대책 없이 쌓여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보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무너지면 나는 이 쌓임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를 가늠하며 다시 똑같은 탑을 쌓고, 무덤을 올린다. 언젠가 책장을 수납함을 사야지. 깨끗이 비워지기 전 새로운 것을 채우는 꾸준함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가질 수 없는 자질이지. 열쇠를 들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책장을 사 올 정도의 활력이 생길 순 없겠지만, 택배 상자의 뚜껑을 가르고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그들이 늘 함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한다. 너 혼자서는 파악할 수 없다고? 책을 읽는다. 나는 이제 무덤을 파야 한다. 탑을 분지르고, 타인의 시선이 잠시 고정되는 책장을 만들고 말 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두려워. 너의 목소리가 탑과 무덤에 얼마나 먹혀 있었는지를 모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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