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100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장편소설 빛의 여정 100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 가족은 나를 버렸고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였으며 재물은 주머니에 있던 것마저도 빼앗겼노라. 그러나 내겐 신념밖에 없나니. 그 신념으로 말미암아 나는 다시 태어났노라" -피데라시스 최초의 선지자 성 아나트라-
로이딘 빅혼. 시테온. 그리고 루네. 이 세명이 전투 수도사로써 처음 밖으로 발을 디딘 지 얼마 안되어 여섯 수도원 중 하나였던 이질바이나 수도원이 완전히 전소되었다. 수도원의 역사를 비웃듯 불은 더욱 높이 솟아오르며 한 순간에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신전에 있던 피데라 조각상은 무너져버렸고 지하에 있던 창고도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수도원 뒤쪽에 마련된 수도사들의 묘비엔 하얀 재가 날리며 쌓여져 갔다. 인적이 끊겼으나 여전히 그 상징성은 짙게나마 있던 이질바이나 수도원은 이제 피데라시스의 역사 속에서만 모습을 떠올려야 했다.
피데라시스의 본부격인 헤르논의 수도원에 이 소식이 알려진 건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금강앵무새 세라가 그날 밤의 타오르는 불을 하늘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창공에서 밤의 감시자로써의 직감으로 수도사 갈리스가 쓸쓸히 건물과 함께 불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얀자에게 달려와서 세라는 갈리스의 죽음을 말해주었다. 주중에 매번 모이는 간부들의 회의에서 세라의 증언을 한 번 더 듣게 되었고 다들 표정이 침체된 채 말이 없었다. 발길이 끊긴 그곳을 끝까지 지킨 마지막 수도사 갈리스를 추모하며 기도를 잠시 드렸다.
갈리스를 순교자로 추대하느냐 마느냐에 잠시 토론이 이어졌다. 피데라시스에서의 순교자의 정의는 단순히 같은 신앙을 믿는 자들 혹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거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다.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죽은 피데라시스만을 순교자로 칭했다. 전자의 의미는 대부분의 종파에서 인정하는 순교자였지만 문제는 순교의 의미를 남발하는 경우. 특히 만신전 학살사건때 워낙 충격을 받은 터라 피데라시스 교단의 세계관을 뒤바꾸어 놓았고 핵심 교리 이외에 여러 교리들이 수정되었다. 빛의 심판에서는 수정 전의 피데라시스의 교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으며 만신전 학살사건 이후 당시 살인자들을 순교자로 칭송하고 있었다.
순교자의 증거가 마련된 후 갈리스에 대한 순교자 논의는 계속하기로 했다. 여섯 수도원 중 하나인 이질바이나 수도원이 방치되면서 지켜주지 못한 책임이 암묵적으로 헤르논 수도원에게도 있어서 난감했고 다들 그 부분을 함구했다. 안타깝지만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버린 수도원을 왈가왈부하기에도 불편해 다들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하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헤르논 수도원에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오고 아침 일과를 마친 로이딘 빅혼은 전투 수도사로써 자신의 심신을 닦을 의무가 있는 몸이라 조용히 신전으로 가서 피데라를 조각한 바위상을 바라보며 고요히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로이딘은 지금 보고 있는 피데라의 석상이 자기가 보았던 피데라의 모습과 달라서 어색함을 느꼈다. 석상으로 있는 피데라는 로이딘에게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눈싸움을 계속 해보았지만 로이딘은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불현듯 로이딘은 멀리 느껴지는 피데라보다 자신과 같은 인간이던 성녀이자 최초의 선지자인 아나트라가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피데라를 영접하고 그 길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를 안다면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조금이라도 파악 할 수 있지 않을 까 기대감과 호기심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그녀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림으로. 기증한 책들과 함께 그녀를 기리기 위한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명패가 작품 아래에 있었다.
"빛의 사도. 성녀이자 최초의 선지자. 성 아나트라"
대륙의 사람들 중 피데라시스를 아나트라라는 여성을 섬기는 종파라며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 아나트라가 피데라와 사실 연인 관계였다며 그것을 야설로 만들어 음유시인으로 활동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한 의식의 흐름들은 피데라시스가 난교하는 밀교 집단이 아니냐며 물어보는 자들도 있었다. 한 술 더 떠서 빛의 심판이라는 이단 종파가 피데라시스의 이미지를 더욱 나빠지게 하는데 기여했다. 그렇게 피데라시스 역사 초창기의 흐름들을 읽으며 로이딘은 아나트라의 언행을 중점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아나트라를 연구하는 주석서에선 아나트라의 평가를 이렇게 담고 있었다.
"그녀는 기준을 제시했고 그 기준을 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다소 무미건조한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으로 표현 못할 아나트라의 삶은 실로 역동적이었다.
로이딘은 성 아나트라가 혈혈단신으로 전장으로 달려가 깃발을 휘날렸던 스토리는 워낙 익히 보고 들어 알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한 페이지는 넘기면서 다른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100화까지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101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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