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104화

장편소설 빛의 여정 104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by 포텐조

장편소설 빛의 여정 104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아디일라의 공격로.jpg 아디일라의 진격로

파멸. 아디일라의 군대가 지나가면서 남겨 놓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약탈과 방화로 인해 마을들이 쑥대밭이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아보테의 동쪽 국경은 밤과 낮이 분간이 안될 정도로 거점들이 밝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국경수비대의 기지들은 잿더미로 사라진 채 타닥거리는 불씨들만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만 명이 넘는 규모의 군대가 몰려오는 바람에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소리가 들림에도 사람들은 멀리 도망칠 수 없었다. 한 순간에 파고드는, 일사불란한 그들의 모습에 아보테의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야만적인 고음을 내지르며 귀청이 터질 것 같은 거인들의 고함은 아보테가 자랑하는 담대한 군마들 마저 충격을 받아 제 주인을 안장에서 떨어 뜨리고는 도망을 쳤다. 산 속에 숨거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멀리서 불에 타는 자기 마을을 보며 좌절과 불안속에 갈팡질팡 해야 했다. 금방이라도 어디서든 튀어 나올 것 같은 아디일라의 군대는 철저하게 아보테를 농락하고 있었다.


점점 영토 깊숙히 진군하면서 아보테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저항하자 아디일라의 국왕 피네로는 군대를 둘로 나눠 보내 후방으로 진군케 했다. 결사항전을 각오하는 디에프 성의 성주는 급히 서신을 수도 디고로 보내며 성문을 굳게 걸어 잠궜으나 언제까지 버텨야 할 지는 자신이 없었다. 보이는 곳곳에 이미 개미떼마냥 몰려온 야만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야만인의 두배 키를 자랑하는 거인들이 몽둥이를 날려보내 성벽을 건드리면서 겁을 주고 있었다. 피네로는 의자에 앉아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한 채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체될 수록 불리한 건 아디일라였기에 막힌 길을 뚫기 위해 공성병기를 거인들을 동원하여 즉석에서 만들고 있었다. 디에프 성주는 공성망치가 완성되는 날이 바로 모든 게 끝장나는 날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사방이 포위된 채 구원 병력만을 기다렸다.


레비에 위치한 전초기지는 방비가 잘 되어 있고 방어 병력을 보낼 여력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으로 당장 자신들의 기지를 수비하기에도 바빠 디에프로 지원을 보내줄 수 없게 되었다. 레비의 사령관도 서신을 디고로 보내 방어군을 위한 지원병력을 보내달라 요청했다. 아디일라의 2군이라 할 수 있는 병사들이 이리저리 레비 기지 근처 마을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레비의 병력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적을 쳐서 수십명을 쓰러뜨렸지만 군세와는 다르게 이들은 적당히 싸우다 도망치고 있었다. 몇 번 정도 계속되는 후퇴 전략을 눈치 챈 레비의 사령관 역시 병력이 묶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디에프 성주와 마찬가지로 디고에서 군대를 언제 보내주나 초조히 기다리며 수비만 하고 있었다.


아디일라의 2군 사령관, "칼"은 피네로의 차남으로 연약한 장남을 대놓고 암살한 후 아버지에게 계승을 요구한 정신나간 인간이였다. 그러나 그 아들의 그 아버지라. 피네로는 장남 살해를 오히려 대담하다고 칭찬해주고 차남을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칼의 도박은 진정 용기였는지 무모함이었는지는 오직 스스로만이 알 것이다. 칼은 아버지가 부여한 임무대로 착실히 나눠진 군대 2군을 이끌고 디에프의 후방인 레비의 기지와 마을을 기습하여 적의 전력을 서서히 말려 죽이고 있었다. 잔인함도 부전자전이어서 포로는 남기지 않거나 전투 후 극 소수만을 장난감처럼 부리다 제거하는 식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데 차질이 없게 했다. 그의 방식에는 오로지 효율성만 있었을 뿐이다. 잔인한 아디일라의 군에서도 손 꼽히는 무용담이 칼에게서는 넘쳐났다.


칼은 전투 시작 전에 아보의 목상 앞에 기도하는 아보테의 병사들을 보면서 욕을 내뱉고 비웃었다.

"하! 어디 실컷 기도해보라지. 온기없는 신 앞에서 네놈들의 머릴 한 번 잘라보자!"

칼은 피로 얼룩진 칼날 채찍을 휘두르며 자신의 부하들을 돌격하게 했다. 그가 한 번 크게 휘두르니 노예든 병사든 등짝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서 빨리 베이고 싶지 않으면 앞다투어 먼저 달려가야 했다. 야만인의 공세에 아보테의 방패가 으스러졌다. 창을 꽂아 넣었으나 야만인은 더 크게 짖으며 몽둥이와 도끼를 휘둘렀고 갑옷을 껴입은 아보테의 병사들은 여기저기 얻어맞으면서 쓰러져갔다. 끝까지 저항하는 아보테 군 앞엔 설산에서 데리고 온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몽둥이를 높이 들어 올리고 휘두르자 서너 명의 병사들이 날아갔고 날아간 병사들이 쓰러지면 야만인들이 처리했다. 거인들은 다리를 들어 방패로 모인 병사들을 발로 걷어차며 전열 흔들기도 했다.


일방적인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 온기가 식은 싸늘한 시신들이 대지를 덮고 아디일라의 병사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죽은 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취했다. 기세가 등등한 칼은 군대를 공포로 다스렸지만 전리품은 신경써서 나눠주며 적절한 사기를 유지했다.

"창칼이 없어 박치기라도 날린 놈은 죽어버린 놈 목걸이를 하나 더 챙겨도 좋다!"

덕분에 어떤 병사는 고리 던지기를 하듯 목걸이를 겹치고 겹친 채 차고 다니며 으스댔다. 경쟁심에 너도나도 아보테의 군사 혹은 주민들을 발견만 하면 배가 고픈 와중에도 달려나갔다. 추운 북쪽 지방에서 영원한 추위까지 찾아와 삶이 처참해진 아디일라 부족민들은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고 배고픔은 광기가 되었다. 바슬라를 통과해 따뜻한 남쪽 나라 아보테로 오니 해동되는 몸과 함께 사방 천지가 먹을 것 투성이었다. 그게 사람이든 말이다.


파멸. 대주교가 디고의 대신전에서 아보의 종말론을 설파하고 이단 추적대가 아나티리캄을 정죄하고 있었지만 아보테에게 돌아온 건 아보의 축복이 아닌, 파멸의 전조 뿐이었다.




105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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